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 아름다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그녀의 일생
- 진정한 비욘드 뷰티를 보여준 그녀의 삶
1993년 1월 20일.
아름다운 그녀 오드리 헵번은 스위스 톨로 체나스에서 63세의 나이로 우리곁을 떠났다.
내년이면 그녀와 이별한지 25주기가 된다.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란 말은 오드리 헵번을 두고 한 말일까.
외면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조화롭게 이루어 낸 아름다움의 진정한 아이콘, 나의 뮤즈, 오드리 헵번
1. 오드리헵번의 어린시절
영국인 아버지와 네덜란드 유서깊은 귀족출신 엄마 사이에서 1929년 5월 4일 벨기에 블리쉘에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비교적 내성적이었던 오드리헵번은 5살때 영국 기숙사 학교로 가면서 발레와 음악을 접했다. 어린나이에 엄마와 떨어져 지내며 생긴 그리움과 서툰영어, 통통한 몸으로 운동도 잘하지 못해서 받은 따돌림들을 극복해 내며 점차 독립심이 강한 꿈많은 소녀로 성장하고 있었다.
발레리나를 꿈꾸며 자라던 그녀나이 10살무렵. 세계 2차 대전이 터지면서 그녀는 네덜란드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 당시 아버지 안소니 헵번은 독일 나치에 적극 동조하며, 가족을 버리고 떠났고,
그녀의 오빠들 역시 독일군에게 끌려갔으며 그녀를 아끼던 이모부도 죽임을 당한다.
전쟁으로 인해 붕괴 되어버린 가족, 피난민의 처참한 아픔과 충격과 배고픔을 견뎌내야 했다.
( 그녀가 배우일 때 '안네의 일기' 영화 캐스팅 제의를 받고 악몽에 시달리며 거절했다고도 전해진다)
전쟁기간동안 집안에 숨어 수개월을 튤립뿌리를 먹으며 연명하던 그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천식,부종,황달,빈혈,자궁내막증등 각종 합병증을 얻었고
일부는 평생을 안고 가야했다. 오드리헵번은 유니세프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발레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170cm의 큰 키와 좋지 않은 건강상태는 꿈에 제약이 되었다.
발레리나의 꿈을 접고 그녀는 암스테르담에서 모델로 활동하며, 파리와 런던에서 연극과 영화의 단역배우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2. 오드리헵번의 배우활동
1952년 뮤지컬 <GIGI(지지)> 의 작가가 오드리헵번을 발견하였고, 감독에게 그녀를 여주인공으로 해달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캐스팅이 된다.
그후 1953년 <로마의 휴일>의 여주인공역에 발탁되어 세계적 인기를 누리게 된다. 오드리햅번의 캐스팅은 무명이었던 그녀에겐 엄청난 기회였다.
예정 되어있던 감독도 여러번 계속 바뀌고 예산도 축소되고 인기배우들의 스케줄도 맞지 않아 캐스팅된 첫 주연작 <로마의 휴일>은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이후, 1954년 그녀는 <사브리나>에서의 여주인공 역할도 훌륭하게 소화해 내어 다시한번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그녀의 인지도는 더욱 높아갔다. <사브리나> 출연 후 그녀는 영화가 아닌 브로드웨이 연극 <운디네>에 물의 요정 역할로 출연했고, 연극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토니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그저 예쁜 배우가 아닌 연극 배우 출신의 정체성을 굳혔다.
1957년 발레리나를 꿈꾸던 그녀의 경험과 노래실력을 살린 뮤지컬 영화 <화니페이스>에 출연했고, 그녀는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중에 본인의 실제 성격과 가장 비슷한 영화로 <화니페이스>를 뽑았다고 한다. 1961년, 시대의 아이콘으로 입지를 굳힌 작품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홀리 고라이틀리 역을 맡았다. 블랙 드레스와 선그라스 진주목걸이와 티아라, 긴 장갑를 하고 쇼윈도우 앞에서 화려한 보석을 감상하며 커피와 도넛을 먹는 모습은 현재도 명장면으로 꼽힌다. 1964년 <마이페어레이디>에서 거리에서 꽃을 팔던 아가씨에서 우아한 여인으로 변모하는 역을 맡아 다시한번 그녀의 매력을 뽐냈다. 그녀는 1967년까지 겨우 15번의 배역을 맡았고 1960년 <어두워질때까지> 이후 영화 출연을 줄여가다 1989년 <영혼은 그대곁에>를 끝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3. 오드리헵번의 외모와 스타일
관능적이고 섹스어필하는 글래머 여배우들이 인기가 지배적이었던 당시에, 그녀는 마른 몸에 고전적인 얼굴과 지적인 이미지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대 최고의 아름다운 여배우로 꼽히며, 현재까지도 여러 광고에 쓰일 정도로 미의 상징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외모 컴플렉스가 있었다고 한다. 지인들에게 "나는 피부도 좋지 않아서 화장을 하지 않으면 볼품이 없고, 얼굴도 각지고 콧등도 매끄럽지 않으며 이런 외모로 영화배우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조차 못했다."고 말한적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의 마른몸은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의 헤어스타일과 옷차림등 그녀의 스타일은 꾸준히 회자된다. 데뷔 작품인 <로마의휴일>에서 선보인 헤어컷도 "헵번스타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사브리나>에서는 영화배우 최초로 특정브랜드에서 의상을 협찬받았는데, 이때 협찬한 브랜드가 지방시(Givenchy)이다. 지방시는 이때 얻은 광고효과로 세계적인 패션브랜드로 성장했으며, 이 후 오드리헵번에게 의상협찬을 적극 지원했다. 그녀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서 입은 그녀의 시그니처 블랙 드레스도 지방시의 드레스이다. 배우로 활동한 시기의 오드리헵번은 말그대로 유행의 선두주자이자 당대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이 사랑한 배우이기도 했다.
4. 오드리헵번의 러브스토리
영화계에서의 배우로 지낸 삶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녀가 항상 바래왔던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삶은 다소 성공적이지 못했다. 결혼 전 약혼했던 제임스 핸슨과는 그녀가 유명세로 바빠지자 헤어지게 되고, 이후 1954년 세번째 와이프를 버리고 네번째 결혼을 하는 바람둥이 멜 펠러와 결혼한다. 오드리헵번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등 거장들의 캐스팅 제안을 거절하고 남편이 감독하는 영화에 출연하는 등 그를 사랑했지만, 정작 멜펠러의 바람기와 오드리헵번을 향한 그의 열등감으로 잦은 다툼을 했고, 첫 번째 임신 중에 촬영 중 낙마사고를 당해서 유산이 된 후에 자주 유산을 하게되었고, 결혼 생활 말년에는 그녀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고 한다. 오드헵번은 그녀의 첫째 아들 '션 페러'를 얻고 1968년 이혼했다. 약 2년여 세월이 지나 그녀는 새로운 사람과 결혼했다.
그녀와 두번째 결혼을 한 9세 연하의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는 22세때 시대의 아이콘으로 영화 촬영을 하던 오드리헵번에게 다가와 악수를 건냈던 14세 소년이었다. 전성기의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사랑했던, '나중에 꼭 오드리헵번과 결혼하겠다'고 말하던 그는 중년이 된 평범한 엄마와 부인을 꿈꾸던 오드리헵번을 원하지 않았다. 평범한 여인의 오드리헵번이 아닌 배우 오드리헵번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의 외도 또한 번번히 가십기사로 다뤄졌다. 1979년 두번째 아들 '루카 도티'를 두고 결국 이혼한다. 두번의 이혼을 겪은 그녀는 모든 영화계 생활을 접고 온전히 두 아들에게 집중했다. 이혼 후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한 그녀는 간간히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유명세를 세계구원에 적용하기 위해서 였다. 도티와의 이혼 후 구호 활동 시기에 진정한 소울메이트인 네덜란드 배우 로버트 월더스를 만났다. '결혼이 그 어떤것도 추가하지 못할 만큼 사랑으로 충만하다'고 말하던 둘은 결혼은 하지 않았고 그는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곁을 지켰다.
5. 오드리헵번의 유니세프 활동과 생의 마지막
은퇴와 이혼이후 오드리헵번의 구호활동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의 인기와 명성을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기뻐했다.
유니세프 대사로 인권운동과 자선사업 할동에 참여하여 제3세계 오지 마을에서 아이들을 도왔으며, 구호 지역의 많은 생명들을 돕는데 힘썼다. 그녀의 활동들은 외모보다 아름다웠다. 60세를 바라보던 그녀는 오지,전장,전염병 지역 그 어디든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열성적으로 찾아갔다. 구호 메세지를 알리기 위해 배우 시절에도 잘 하지않던 인터뷰를 자청했고, 그녀의 활동들은 전 세계인들에게 구호활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했다. 1992년 9월 소말리아 방문 전 부터 오드리헵번의 건강은 적신호였다. 나이를 고려하지 않고 진행한 무리한 일정들에도 진통제로 고통을 참아내며 소화했다. 소말리아에서 돌아 온 이후에 구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사중에도 진통제를 달고 지냈다. 결국 11월 그녀는 직장암 진단을 받았고 수술했으나 경과는 좋지 않았다. 그녀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은 3개월, 그녀는 오랫동안 살았던 스위스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마지막 생을 고요하게 보냈다고 한다. 오드리헵번은 사랑하는 가족과 로버트 월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1993년 1월 20일 63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정열적이고 진심어린 구호활동은 민간 구호 단체와 유니세프가 함께 제정한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통해 그 뜻이 이어지게 되었다.
6. 아들에게 남긴 시 (개인적으로 이 시는 정말 아름답다)
Time Tested Beauty Tips
세월이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결
For attractive lips, speak words of kindness.
매혹적인 입술을 가지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하라.
For lovely eyes, seek out the good in people.
사랑스러운 눈을 가지고 싶다면 사람들의 선한 점을 보아라
For a slim figure, share your food with the hungry.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다면 배고픈 자와 음식을 나누어라.
For beautiful hair, let a child run his fingers through it once a day.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지고 싶다면, 하루 한번 어린이의 손가락으로 그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게 하라.
For poise, walk with the knowledge you'll never walk aone
아름다운 자세를 가지고 싶다면, 결코 그대 혼자 걸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도록 하라.
People, even more than things, have to be restored, renewed, revived, reclaimed and redeemed and redeemed..
재산 보다는 사람들이야 말로 회복되어야하고, 새로워져야 하며, 활기를 얻고, 깨우쳐지고,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Never throw out anybody.
Remember, if you ever need a helping hand. you'll find one at the end of your arm.
누구도 내버리지 말라.
기억하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때 그대는 자신의 손 끝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As you grow older you will discover that you have two hands.
One for helping yourself, the other for helping others.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대의 손이 두개이 이유가
하나는 자신을, 하나는 다른이를 돕기 위해서 임을 알게 되리라.
오드리헵번의 유언으로 전해지고 있는 이 글은 시인 샘 레벤슨(Sam Levenson)의 시이다.
7. 오드리헵번의 영향력
2014년 5월 4일 구글에서 오드리헵번의 탄생 85주년을 기념하며 기념일 로고를 제작했다.
2014년 11월 29일부터 2015년 3월 8일까지 오드리헵번의 생애 전체를 보여주는 전시회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렸다.
그녀의 둘째아들 루카 도티는 <오드리헵번 어린이재단> 회장을 맡고 있으며, 그는 헵번이 출연한 영화의 소품, 의상, 생전 물품들을 전시하는데 주관했다.
그녀의 첫째아들 션 페러는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먼 나라의 비극에 발벗고 나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세월호 기억의 숲'을 조성을 제안했고,
304명의 희생자를 낸 4.16 세월호 참사를 기리기는 '세월호 기억의 숲'은 2016년 전남 진도군 팽목항으로 부터 4.16km 떨어진 곳에 완공 되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화려한 패션 뿐 아니라 자신이 받은 전세계인의 사랑을 살아서도 죽어서도
되돌려 주고 있는 진정한 비욘드 뷰티이자 찬란한 별이다.
감히 말하건데 사랑과 나눔을 실천한 그녀의 아름다움이여 영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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