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정말 제대로 미친 구찌(Gucci) - 역사편





구찌가 미쳤다. 물론 좋은 의미로.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분명 공감의 마음으로 클릭했을 것이라 믿는다.


구찌의 룩북을 보고 이렇게 미소지어 본지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최근에 다녀온 마카오에서도 나는 구찌 매장에서 가장 오랜시간을 보냈다. '패트리지오 디 마르코' CEO 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리다 지아니니'가 물러나고, ''마르코 비자리' CEO와 그가 무명의 디자이너 '알렉산드로 미켈레'를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파격 승진시킨 일은 그야말로 구찌의 '신의 한수' 였다. 

새롭게 등장한 다크호스 '알렉산드로 미켈레' 와 관해서는 따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프리다 지아니니'의 사임은 새로운 구찌를 위한 자진 사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2014.12.13 기사)는 실적부진으로 구찌의 고위경영진 2명 (CEO 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 전격 교체 된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의하면 구찌의 2014년 3분기 매출이 전년동기 대비 1.6% 감소했으며 상반기에는 4.5%가 감소 했다고 한다. 실적 부진을 타개하기 위한 구찌의 선택은 성공적이다. 

파격적 인사와 함께 최근 다시 가장 핫한 브랜드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구찌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왔을까?











구찌(GUCCI) 는 구찌오 구찌(Guccio Gucci)에 의해 이탈리아 피렌체에 설립한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이다.

구찌의 창립자인 구찌오 구찌는 188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대대로 밀집모자를 만들던 집안에서 태어 났다. 구찌오 구찌는 밀짚모자 사업이 사양 산업이라고 판단하여, 그의 나이 17세때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전 세계 부호들이 모이는 사보이호텔(Savoy Hotel)의 벨보이로 들어간다. 허드렛일이지만 상류층 고객들의 최고급 가죽트렁크를 옮기며 깊은 인상을 받았고 가죽제품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이후 1902년 고향인 프렌체로 돌아와 프란지(Franzi)라는 제조업체에서 가죽 공방 기술을 배우고, 1921년 피렌체의 비냐 누오바 거리(Via VignaNuova)에 자신의 이름을 딴 '구찌' 가죽전문매장을 열었고, 연이어 같은 해 빠리오네 거리(Via Del Parione)에 두번째 매장을 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적 명품 '구찌'의 시작이었다. 그 후 네 아들과 함께 1940년대 무렵 밀라노,로마 등 이탈리아 패션 중심지를 비롯, 1950년대 부터는 런던, 뉴욕, 파리 등 전세계로 매장을 확대했다.




'구찌'를 오픈하기 전 구찌오 구찌는 1906년 작은 마구상을 운영하면서 가죽 승마용품으로 인기를 끌었었다. 하지만 승마용품은 귀족들에게는 인기가 많았지만 마차의 활용이 점차 줄고 자전거가 인기를 끌면서 마구상을 접고 작업장과 제품군을 을 확대하여 '구찌'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인지 구찌의 가죽제품은 승마로부터 영감을 받은것이 많았다. 승마 용품중 호스빗(Horsebit:말의 재갈)을 가죽용품에 장식하는 것은 구찌의 고유한 상징이되었다. 














구찌는 위기에 강하다


 구찌는 위기의 상황도 현명하게 대처했다. 1940대 제 2차 세계대전으로으로 모든 물자가 전쟁에 동원대야 했고, 국제연명에선 이탈리아로 수출금지령을 내려 가죽이나 금속 등의 소재가 부족해졌다. 첫째 아들 알도 구찌(Aldo Gucci)는 대나무, 대마, 황마 등의 대체품을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냈고, 대마와 삼마를 이용해 작은 다이아몬드 형태가 서로 연결되는 직조로 새긴 디아멘테(Diamante) 캔버스가 나왔다. 위기의 순간에 구찌의 첫 시그니처 캔버스가 개발 된 것이다. 1947년 제 2차 세계대전은 종료되었지만 패전국인 이탈리아의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이때 수많은 가죽 업체가 도산했다. 알도 구찌는 가죽을 돼지피역을 활용하는 대안을 찾아냈고, 유일하게 수입이 가능했던 일본의 대나무를 활용하기도 했다. 전쟁 후의 위기는 구찌 역사상 가장 인기제품으로 알려진 뱀부백(Bamboo Bag)이 탄생했다.







가족경영, 그리고 경영권싸움


 1953년 창립자인 구찌오 구찌가 72세로 세상을 따나고, 알도 (Aldo), 바스코 (Vasco), 우고 (Ugo), 로돌프 (Rodolfo) 구찌 4형제가 구찌를 이어 받았다.  알도 구찌는 탁월한 비지니스 감각으로 구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60년대 중반에 창립자인 아버지 이름에서 딴 GG 로고를 만들고 이를 캔버스 소재로 만들어 가방, 옷, 악세서리에 사용했으며 같은해에 재키 백(Jackie Bag)을 만들었다. 또한 팜비치,비버리힐즈,도쿄,홍콩 등에 매장을 내며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게 했다. 구찌는 가족 경영진에 결정을 통해 로돌프 구찌가 경영권을 가지게 되었다. 1년 뒤, 로돌프 구찌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마우리초(Maurizio) 구찌가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하지만 알도 구찌의 아들인 파올로(Paolo) 구찌는 마우리초 구찌의 경영권 승계에 크게 반발했고, 파올로 구찌(Paolo Gucci) 라는 이름으로 핸드백,악세서리, 와인 등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이는 구찌 이사회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며 이탈리아 전통의 가족 경영에 위기가 왔고 무분별한 라이센스 남용으로 구찌의 이미지도 추락하면서 구찌의 재정난도 심화되었다. 가문내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구찌오 구찌의 손자 마우리초는 구찌의 옛 명성을 찾기위해 노력했다. 마우리초 구찌에 의해 90년대 뉴욕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 톰포드(Tom Ford)가 영입되었고 변화와 노력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던 1995년 밀라노 자택 앞에서 마우리초 구찌는 전처의 총에맞아 사망하는 비운의 인물이 된다.







전문경영인의 시대 



 1984년 이탈리아 출신으로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워싱턴의 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던 도메니코 데 쏠레(Domenico De Sole)를 구찌 아메리카의 사장 겸 관리이사로 영입했고, 버그도프굿맨(Bergdorf goodman)백화점 뉴욕지사장 돈 멜로(Dawn Mello)를 디자인 총괄이사로 영입했다. 이로써 구찌의 전문 경영인 시대가 시작되었다. 도미니코 데 쏠레는 남발했던 구찌의 10만여종에 달하는 라이센스 사업을 정리했고 프렌차이즈도 환수해가면서 전세계적인 명성을 되찾아갔다. 1987년부터 바렌인에 본사를 둔 투자회사 인베스트코프(Investcorp)가 구찌의 지분을 인수하기 시작했고, 1989년 알도 구찌와 파올로구찌가 보유한 50% 지분을 모두했다. 이후 1993년 마우리초 구찌가 자신의 50% 주식 지분을 매각하면서 인베스트코프가 구찌의 전체 지분을 차지했다. 1995년 돈 멜로는 구찌를 떠나 버그도프굿맨 백화점을 회장으로 돌아갔고, 도메니코 데 쏠레는 구찌의 CEO(최고 업무 책임자)를 맡았다. 1998년 구찌는 "올해의 유럽 기업"에 선정되고, 이후 패션계 에서는 단순히 옷을 디자인하는 수석 디자이너 개념에서 더 나아가 매장 구성과 광고까지 진두진휘하여 브랜드 전체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크리에이티브 디랙터라는 포지션이 유행하게 된다. 

 

 1999년 구찌는 피노-프렝탕-루두트(PPR : Pinault-Printemps-Redoute)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단일 브랜드 회사에서 복수 브랜드 그룹으로 전환했고 구찌그룹(GUCCI Group)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이브 생 로랑', '세르지오 로시' 등 많은 브랜드를 흡수했고 몸집을 키워나갔다. 2004년 구찌 변화의 주역이었던 도미니코 데 쏠레와 톰포드는 재계약에 대한 PPR그룹과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구찌를 떠났다. 이 후 마크 리(Mark Lee)가 구찌의 새로운 CEO로 지명되고, 남성복 디자인의 존 레이(John Ray), 여성복 디자인의 알렉산드라 파치네티(Alessandra Facchinetti), 악세사리 라인에 프리다 지아니니(Frida Giannini)로 구성된 3인 디자이너 체제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프리다 지아니니는 전 펜디(FENDI)의 핸드백 디자이너 였고, 그녀가 맡은 악세서리 라인이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얻게되면서 2006년 구찌 전체를 단독 총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프리다 지아니니가 구찌를 맡은 후 4년간 구찌의 매출은 46% 신장했고, 2007년 시장 조사 전문회사 닐슨(Nielsen)은 '세계에서 가장 갖고 싶은 럭셔리 브랜드'로 구찌를 선정했다.

 

2009년 마크 리를 대신하여 패트리지오 디 마르코(Partizio di Marco)가 CEO로 구찌에 합류했고 같은 해에 구찌의 디자인 사무실을 로마의 팔라조 알베리니로 옮겼다. 그리고 현재는 서두에 이야기했던 대로 2014년 구찌의 실적부진으로 다시 변화가 찾아온다. 구찌의 부활을 위해 임명된 마르코 비자리(Marco Bizzarri) 가 CEO를 맡았다. 그는 '스텔라 메카트니'와 '보테가 베네타'등 다른 명품브랜드의 CEO를 맡아 성장을 이끌어낸 '두 자릿수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가진 전문경영인다. 맡는 기업마다 두 자릿수의 성장률을 달성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무명의 내부 직원이었던 알렉산드로 미켈레를 수석디자이너로 임명한것도 마르코 비자리이다. 타 명품 브랜드가 외부의 간판급 스타 디자이너를 영입하고, 그 디자이너가 자기의 팀을 데려와 제품을 개편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브랜드 혁신과 전면 쇄신을 외치는 상황에 내부 승진은 드문일이었다. 프리다 지아니니가 밀라노 패션쇼를 5일 앞두고 사표를 던지고 나가면서 후임자 물색이 덜 끝났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지아니니를 도와 구찌를 이끌던 알렉산드로 미켈레의 내부승진은 대 성공이다.





  • 오늘은 구찌의 역사적 큰 사건을 중심으로 흐름을 살펴보았다. 1920년대 작은 가죽전문점에서 시작한 구찌는 약 100년동안 위기와 기회를 현명하게 대처하며 지금까지 명실상부한 대표 명품(名品) 브랜드의 자리를 이어오고 있다. 역사만 살펴보았지만 구찌는 현재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늘 사회 발전과 문화 보존 등에 기여하기 위해 힘썼다. 이러한 면들 역시 구찌를 이어가게 하는 명맥이 아닐까 싶은데,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다뤄봐야겠다. 마지막으로 마르코 비자리의 인터뷰에서 '명품이 되는 조건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마지막으로 이번 구찌-역사편을 종료 해야겠다. 안녕.

  • "첫째는 시간입니다. '명품(luxury)'이라는 가치를 갖기 위해선 절대적으로 시간과 그에 따른 역사가 필요합니다. 신규 브랜드들이 명품 시장에 진출하기 쉽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둘째는 제품에 대한 투자입니다. 이를 통해 브랜드를 차별화해야 합니다. 명품 업계에서 제품에 투자한다는 것은 제조 업계에서 연구·개발(R&D)에 투자하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자금을 투자해 기계를 새것으로 바꾼다고 해서 제품이 좋아지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명품을 만드는 것은 장인, 즉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품에 대한 투자는 곧 사람에 대한 투자입니다. 최상의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고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 [참고자료]
  • 세계브랜드백과,인터브랜드) 구찌(Gucci) 
  • 나무위키
  • 2015.11.07 [Weekly BIz] '두 자릿수 성장'의 마법사 "나만의 경쟁력을 파악하라"
  • 2014.12.13 구찌, 실적 부진에 고위 경영진 2명 전격 교체 - 이데일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