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의 선생님 '이서윤' 작가님 

- 부와 행운을 끌어당기는 힘 '더 해빙' The having 

 

"당신은 해빙하시나요?"

요즘 서점가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가장 핫한 책이 있습니다. 필자도 서점에서 한권 구입했습니다.

부와 행운의 법칙을 알려주는 책. 더 해빙.

 

전직기자 였던 홍주연님이 동서양의 운명학을 두루 익힌 행운을 전하는 운명을 타고난 이서윤 선생님을 만나서 배우고 나눈 이야기를 담은 책입니다. 해외에 먼저 출간되어 부의 영향력을 전세계 뿐 아니라 국내의 많은 이들에게 강한 영향력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독서를 시작하며 이서윤님의 대한 호기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부자들의 구루 '이서윤' 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출처 이서윤 홈페이지

 

 

"이 아이는 내가 사주 공부를 시키겠다.
운을 다루는 공부를 하면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능력이 있다고 나와 있다."

 

상위 0.01%가 찾는 행운의 여신 이서윤. (현재는 개명하였지만 개명 전 이름은 이정일)

이서윤님은 사주와 관상에 능하셨던 할머니 김봉예님의 지원으로 일곱살 때 운명학에 입문했습니다. 이서윤님의 할머니는 이 어린 손녀의 삶은 사람들에게 행운을 불러오는 운명이라 말했습니다. 겨우 일곱 살인 딸에게 사주 공부를 시킨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서윤의 어머니를 놀라게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평범한 여자로 살기를 바랐던 어머니의 의견과는 달리 이서윤은 할머니가 시키는 공부를 잘 따랐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명리학과 당사주를 시작으로 자미두수, 기문둔갑, 월령도,점성학 등의 동서양을 운명학을 빠짐없이 익히고, 십만여 건의 사례를 과학적으로 분석하였습니다. 운명학 공부를 시작한 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원리를 익히고 사례를 찾았습니다. 모든 원리를 익힌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는 국내 유명하다는 도사들을 만나 배움을 이어갔습니다. 물론, 유명세와 맞지 않게 돈만 요구하는 형편없는 분들도 많았지만 다섯분 정도에게는 좋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대가 없는 배움은 없었습니다. 배움에 쓴 돈만 약 10억원이 넘었지만 모두 할머니께서 도움을 주셨다고 합니다. 겨우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점 잘보는 애'로 알려졌고, 부동산 투기가 한참인 시절인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강남의 복부인들이 학교앞에 진을 쳤습니다. 

 

이서윤의 할머니와 어린 이서윤

 

고등학생때부터 이서윤에 대한 소문은 부자들의 귀한 비밀이었습니다. 이서윤은 그 때부터 자신을 찾는 부자들의 자문에 응하였습니다. 돈을 받고 상담을 하며 한참 유명세를 타고 있을때 어머니의 반대는 다시 시작되었고, 대학에 입학하라는 통보를 받고 연세대학교 경영학교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진학하여 공부하였습니다. 오히려 국내를 떠나 해외의 '비기'를 공부하기 시작했고, 대학 1학년때인 1999년에는 인도의 고전 점성술인 베딕을 공부했습니다. 미국과 유럽 등지를 오가면서 세계 각지의 운명의 대가들과 교류하며 내공의 깊이를 더했습니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의 역사상 운명학을 공부한 학생은 네가 처음일거야."

 

그녀의 할머니는 심상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심상을 키워 마음으로 상대를 치유하라.'고 가르쳤습니다. 할머니는 동자승부터 스님이 된 경우와 나이가 들어 스님이 된 경우를 예로들어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20세 때 배우면 그때까지 생긴 가치관과 선입견이 개입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운명학 공부는 어릴때부터 해야 이런 편견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사실을 바라볼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서윤을 찾아와 자문하는 이들은 대기업의 오너나 주요 경영인들, 대형 투자자들 등 상위 0.01%에 해당하는 슈퍼 리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서윤의 조언에 따라 조직의 인사를 단행하거나 적략을 수정하거나 투자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서윤님에 따르면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니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운이 바뀌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릇과 격이 바뀌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운은 결정된 게 아니다. 중요 시점에서 잘 결정하면 바뀐다. A,B중 선택권은 전적으로 본인에게 있는데 살아온 성향으로 제대로 선택하지 못하는 것이다. B를 선택하면 인생이 바뀌는데도 A를 선택한다. 모두가 그렇다."

"사회지도층을 컨설팅하면 다음 번에는 바뀌어서 찾아온다. 하지말라는 것은 하지 않고, 하라는 것은 한다. 한마디로 실행력이 뛰어나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알면서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늘 '알지만 안 돼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잘 되는 사람들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2001년 미국 911테러 당시 큰 충격이었다. 수천명이 죽을 운명이었을까. 그래서 지인을 통한여 당시 사망했던 40명의 사주를 받아봤다. 죽을 운명이 아니었다. 그럼 왜? 그건 미국의 국운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 수만명이 원자폭탄으로 희생되었다. 이것 또한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일본의 운명 탓이다."



 

이서윤님은 운은 자신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내 안의 나를 알고 다루는 게 바로 '운'입니다. 어찌보면 평범한 진리 이지만 자신을 잘 알면 중요한 선택의 순간 자신에게 맞는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직접 만나적은 없지만 도서를 통해 이서윤님을 만나고 강한 영감으로 필자의 인생도 조금씩 변화하고 있습니다. 자라온 이야기부터 호기심을 자극하는 그녀는 '지금과 여기'에 충실한 삶을 원하는 제게 매일의 감사와 풍요와 평화의 영향력을 주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삶과 심성에 저야 말로 치유 받았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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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논나의 패션

 

아름다운 할머니, 밀라논나 Milanonna

 

챠오 아미치(친구)~ Ciao Amici~ 로 부드러우면서 여유롭게 인사하는 밀라논나 할머니를 아시나요?

랭자언니가 밀라논나 할머니를 처음 접한 건 알수없는 유튜브 알고리즘이 안내해 준 아래의 영상입니다.

 

밀라논나를 처음 알게된 영상

 

 

그 당시에도 이미 10만 구독자 감사영상을 올리셨으니 폭발적 관심의 크리에이터셨네요.

세월이 느껴지는 백발의 외모지만 그레이 스키니와 톤온톤의 심플한 셔츠를 입고 볼드한 장신구를 레이어링 한 세련된 할머니의 옷장공개 영상은 클릭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유튜브 채널운영 약 10개월에 오늘 날짜로 이미 해당 영상의 조회수는 1백만이 넘었고, (가장 많은 영상은 350만 회에 달한다.) 현재는 구독자가 62.5만 명으로 반응 좋은 인기 채널을 운영하고 계십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 중에 아직도 구독전이시라면 꼭 한번 방문해 보세요.

 

 

 

밀라논나 유튜브 메인

 

 

밀라논나 할머니를 계속 구독하고 지켜보고 있는데, 밀라논나 할머니는 시대를 초월하는 패션뿐만 아니라 라이프스타일과 삶을 대하는 여유로운 자세까지. 새로운 문화 주체자로 떠오른 오팔 세대의 대표주자로 과히 인생의 롤모델로 삼기에 충분합니다.

 

제가 수집한 밀라논나 할머니의 정보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죽을 때까지 변화하고 싶다."
"본인이 명품이면 되거든요."

밀라논나 Milanonna (본명 ; 장명숙)

출생 1952년생

국적 대한민국

종교 가톨릭 (안젤라 메리치)

학력 이화여대 장식미술학과

가족 남편, 2남

40년째 패션계에 몸담고 계신 대선배

'바다에서는 베르사체를 입고 도시에서는 아르마니를 입니다.'(2009)의 저자 -절판되었다가 2020년 1월 새로 출간

'밀라노'+'논나'(할머니라는 이탈리아어)를 합친 작명

키 161.3cm이셨는데 현재는 158cm 정도

평범하게 살길 바라셨던 아버지의 바람으로 결혼을 하였지만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 사는 삶의 갈증을 느껴

1978년 이탈리아 밀라노로 유학 간 최초의 한국인 (부부가 함께 유학)

살바토레 페라가모, 막스마라, 겟유즈드 등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를 1990년대 한국에 론칭한 장본인

밀라노와 한국을 오가며 살고 계시지만 최근엔 코로나로 인해 한국에 머무시는 중

밀라논나의 재능과 여유로운 노년생활을 아까워한 후배의 권유로 유튜브 시작 (2019년 10월 7일)

2019년 10월 10일 자신의 소개 영상과 '60대 명품 바이어가 고른 자라 ZARA 꿀템' 영상 업로드.

 

 

 

 

 

 

밀라논나 할머니의 영상을 보고 있자면 패션에 대한 정보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왠지 차분하게 힐링이 되는 기분입니다. 최근에는 '90년대생이 무서워요' '직장상사가 폭언을 해요' '논나의 Q&A' 등의 어린 아미치들부터 성인 아마치들과도 활발하게 소통중입니다.

 

 

밀라논나 인스타그램 @mila_no_nna

밀라논나 할머니는 인스타도 운영 중이신데 일상이나 OOTD 등을 볼 수 있으니 유튜브 구독을 하셨다면 인스타도 꼭 방문해 보길 추천드립니다.

 

 

자신으로 사는 것에 대한 강한 바람을 가진 필자는 예전부터 블랙 원피스에 진주 목걸이를 걸고 죽을 때까지 나의 색을 유지하는 '예쁜 할머니'가 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는데, 밀라논나 할머니는 이런 나에게 깊은 영감과 영향을 주고 계십니다. 밀라논나 할머니가 제 글을 보시게 될지 모르겠지만, 언제 어디서든 지금 모습 그대로 건강 잘 챙기며 곁에 계셔주시길 기도드리겠습니다. 앞으로의 활약도 꾸준히 지켜보는 아미치가 될게요. 

 

아름다운 나의 할머니 '밀라논나'

 

 

감사하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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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슈퍼스타 이효리, 매력적인 '코스모폴리탄 인터뷰'


우리나라의 손꼽히는 스타 중에서도 필자가 최고로 뽑는 스타중에 스타는 이효리다.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전략적으로 만들어 낸 듯한 연예인이 있다면 이효리는 그냥 타고난 연예인이라고 생각한다. 이상순과 결혼한 후 '소길댁'이란 닉네임으로 제주도에서 스타가 아닌 평범하고 소소한 삶을 보내고 있는 그녀의 일상조차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다. 꺼지지 않는 영향력의 소유자 이효리. 4년만에 그녀의 컴백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사진출처 : 코스모폴리탄]




컴백 소식과 함께 외부로 노출하기 시작한 이효리는 '코스모폴리탄' 매거진을 통해 '화보장인' 명성에 걸맞는 매력넘치는 화보를 선보였다. 누구도 흉내 낼수 없는 '이효리'만이 내뿜는 자유롭고 세련된 네추럴하면서 '힙'한 화보였다. 따뜻한 햇살이 내리비추는 호주 브리즈번에서 촬영된 이 화보는 '역시 이효리!' 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여담이지만 화보 촬영중 이효리는 태양이 주는 혜택을 고스란히 느끼고 싶다고 말하며, 자외선 차단제도 바르지 않고 본연의 건강한 피부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뿜어내며 촬영했다고 한다.


외모도 중요하지만 내면적인 아름다움이 중요하다 생각하는 필자의 기준에서 이효리의 마인드는 주목할 만 하다. 그런 그녀가 최근 가진 생각들을 이 화보와 함께 실린 인터뷰에서 알수 있었다. 화보보다도 더 아름다웠던 그녀의 인터뷰 중 인상적인것들을 조금 가져와 보았다.




[코스모폴리탄 COSMOPOLITAN] 2017.02.15


이효리의 컴백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팬이 많습니다. 아마 인스타의 댓글을 통해 체감하고 있을 거고요. 이렇게 열렬하게 기다리는 팬들의 존재를 확인할 때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늘 감사하죠. 그리고 사실 깜짝 깜짝 놀라기도 해요. 몇 년 동안 저조차 제가 유명한 사람이란 걸 잊고 살았는데, 아직도 저에 대해 기대하고 궁금해 하는 분이 많다는 게 참 고마우면서 신기한 일이에요.


'흉내 내기식'의 음악이 아니라 '진정성'을 담음 음악을 하고 싶다고 했죠. 그걸 위해 가장 신경 쓴 부분이 있다면 뭐에요?


멜로디와 가사를 제가 직접 만들다보니, 아무래도 이전 앨범보다 화려하거나 매끄러운 건 덜할 거에요. 그렇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걸 좀 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겠죠. 이렇게 화려하고 좋은 음악이 넘쳐나는 세상에 왜 굳이 내가 앨범을 내야 하는가? 그 이유에 가장 신경을 썼어요. 이 앨범이 세상에 나와서 어떤 이로움이 있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오. 흐흐. 좀 거창하게 들릴수도 있지만 제 나름대로는 그 지점에 가장 무게중심을 실으려 노력했어요.


키위미디어그룸 김형석 대표의 인터뷰를 통해 전해진 "상품이 되고 싶지 않다"라는 이효리의 말에서 그 굳은 의지를 읽을 수 있었어요. 대중 스타 이효리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의 삶에서 거리를 둔 것, 제주도에 터전을 잡고 한갓진 일상을 누리는 것, 그래도 할말은 하고 사는 것, 모두 비슷한 맥락에서라고 생각하고요. 어떤 선택이든 결심의 '계기' 같은 건 있기 마련이잖아요. 개인적으로 어떤 지점이었나요?


모든 것이 시작된 계기라면, 순심이를 입양한 것? 순심이를 입양하면서 동물 문제에 눈을 뜨고 그러다가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좀더 깊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된 거니까요. 한번 관심을 갖기 시작하니 사람이든 동물이든 고귀한 생명을 지닌 생명체가 돈이나 권력에 의해 유린당하는 일이 더 자주 눈에 띄더라구요. 동시에 나 자신을 많이 돌아보게 되었죠. 나 역시 돈이나 인기가 최고인 줄 알고 저도 모르게 후회되는 행동을 많이 했으니까요. 제가 싫어하는 그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낀거죠. 그래서 일단 모든걸 멈추고 좀 더 성찰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서 나 자신을 하나씩 찾게된다"라고 얘기한 적이 있죠? 개인적으로 "나를 성장시킨 8할은 연애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으로서 동감하는 부분이에요. 지금의 사랑을 통해 발견하게 된 이효리의 모습은 뭐에요?


그동안 제가 저 자신을 아껴주지 못하고 계속 밀어붙이기만 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항상 뭔가를 하고 있어야 하고 앞에 나서야 하는 그런 사명감 같은게 있었달까요? 그게 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해치게 되더라도 그랬던거 같아요. 남편은 그렇게까지 하지않아도 나 자신이 참 소중하고 괜찮은 존재란 걸 일깨워준 사람이에요.


벌써 결혼 5년차 부부에요. 연애 햇수까지 더하면 '아주 오래된 연인'인 셈이죠. 오래 함께하면서, 서로가 자신을 잃지 않도록 지켜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에 대한 깨달음도 얻었나요?


서로의 취향과 생각을 항상 존중하는 거요. 내가 하고싶고 나만 알고 있는 것들을 강압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달하는 거죠. "나랑 이거 같이해!"가 아니라 "나 이거 할건데 어때? 재밌겠지? 같이 해볼래?" 이런 작은 뉘앙스의 차이가 사실 굉장히 큰 의미를 지니는 것 같아요.


지금의 이효리는 행복해 보여요. 무엇이 이효리를 '지금 가장 행복하게' 만들었을까요?


꼭 행복해야만 성공한 인생이라는 강박을 버리는 것? 사람이 살아가다보면 항상 행복할 수만은 없는 거니까요. 반드시, 꼭,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할 때부터 불행이 오는 것 같거든요. 그냥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시간을, 남에게 못된 소리 하지 않고, 나 자신을 너무 혹독하게 몰아 붙이지 않고, 남들 뭐 입고 뭐 먹고 뭐하고 사는지만 들여다보며 나와 비교하지 말고, 내게 주어진 것들에 감사하고 만족해하며 잘 사는 거죠. 팁하나 더 주자면, SNS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다 나보다 행복하고 좋아 보이거든요. 그거 다 뻥이에요. 하하.



특히나, 마지막 인터뷰 내용이 마음에 와닿았다. 꼭 행복해야 한다고 생각할때부터 불행이 오는것 같다. 최근 필자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에 위로와 용기가 되는 인터뷰였고, 이 포스팅을 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던 답이었다. SNS 를 많이 하지 말라는 말도 공감이 되었다. 어느새 결혼 5년차가 된 이효리는 사랑하는 사람(남편 이상순)에게서 본인이 소중하고 괜찮은 사람이라는걸 깨닫게 되었다 말하며 부러움을 자아냈다. 4년만에 컴백하는 그녀는 패션, 몸매, 삶, 마인드 모든 점을 닮고 싶은 진정한 워너비 스타의 면모를 벌써부터 내뿜고 있으니 컴백이 더욱 기다려 진다. 효리언니!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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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016년 1월 26일 JYP는 원더걸스가 해체했음을 공식 발표했다.


JYP 엔터테인먼트의 공식 입장 전문


안녕하세요.


JYP 엔터테인먼트입니다.


지난 10년 간 항상 함께 해 왔던 원더걸스의 해체 소식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멤버들 간에 또, 회사와 여러가지 의견을 나누고 의논을 한 결과 그룹 원더걸스는 해체를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멤버 중 유빈과 혜림은 저희 JYP 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체결했으며, 향후 음악,연기,MC 등 다방면으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드릴 예정입니다.


또한, 예은과 선미는 많은 고민 끝에 스스로의 길을 새로 개척하고자 아쉽지만 회사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멤버들은 지난 10년 간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지켜봐 주셨던 팬 분들께 감사 인사의 의미로 


데뷔 10주년인 2월 10일에 마지막 디지털 싱글을 공개할 예정입니다.


저희 JYP 엔터테인먼트와 원더걸스 멤버들은 모두 지난 10년 간의 원더걸스의 대장정에 함께 해 주셨던 전세계의 팬 분들께


감사 인사를 드리며, 떠나는 멤버와 남은 멤버 모두의 발전적인 미래를 위해 앞으로도 서로 돕고 의논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Wonder Girls




원더걸스는 JYP 엔터테인먼트의 첫 걸그룹으로 선예, 현아, 소희, 예은, 선미가 '아이러니(Irony)'란 곡에 걸리쉬하고 풋풋한 컨셉으로 2007년 데뷔했다. 초기에 선예를 중심으로 현아,소희,선미 4인조로 준비하다가 데뷔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비공개 오디션을 통해 예은을 합류시켜 5인조가 되었다고 한다. 데뷔후 약 1년여의 기간동안 <Tell me>, <So hot>, <No body>를 연속으로 히트시키며 걸그룹이 침체기를 겪고 있을때 데뷔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 걸그룹으로서 압도적 전성기를 누렸다. <Tell me> 발표 직전 현아가 탈퇴하고 유빈이 새로 영입되었다. 2000년대 중반 발라드 위주였던 가요계에 후크송과 포인트안무,복고풍 등의 새로운 트렌트를 몰고왔다. 특히 원더걸스 전설의 시작이 되었던 <Tell me>는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중독성 있는 가사와 안무로 발표 직후부터 엄청난 인기를 누렸으며 걸그룹 노래 중 '멜론 차트 Top10에 최장기간 진입'의 기록은 이를 증명한다. <Tell me>가 17주 1위,<Nobody>는 16주 2위,<So hot>이 14주 3위로 일명 텔쏘노 라인으로 명실상부한 메가히트곡 그룹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원더걸스는 가장 큰 인기를 누릴때 미국 진출에 도전하게 되었고 그 사이 경쟁구도의 걸그룹들의 노래들이 원더걸스의 빈자리를 차지하며 인기를 누렸고 국내에서 원더걸스의 입지는 점차 줄어갔다. 미국 진출의 꿈은 생각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2010년 선미가 활동

중단을 발표했고, 새로운 멤버로 혜림이 투입되었다. 국내로 다시 돌아온 원더걸스는 <2 different tears>,<Be my baby>,<Like This> 등의 곡을 발표했으나 전성기 만큼의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2013년에는 리더였던 선예가 결혼을 발표하며 탈퇴하였고, 2015년 가장 인기 멤버였던 소희까지 연기자로 전향하며 원더걸스를 탈퇴했다. 



이때가 원더걸스의 위기 혹은 해체시기 일지 모른다는 우려와는 달리 원더걸스 활동을 중단했다가 솔로곡을 발표했던 선미가 재합류하여 팀을 재정비했다.  2015년 원더걸스는 3년만에 밴드그룹으로 색을 바꿔 REBOOT 앨범을 발표했다. 각 멤버들은 직접 작곡을 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새로운 원더걸스의 색깔을 구축해갔다.  이 앨범 타이틀곡 <I Feel you>의 멤버 개인 티저 조회수가 50만을 넘었으며, 제일 먼저 나왔던 선미의 티저는 100만뷰를 기록했다. 그 후 8월 3일 출시된 앨범은 2시간만에 각종 음원사이트를 올킬하기도 했다. <I feel you>는 세련된 디스코 템포 음악으로 80년대 후반 레트로 컨셉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앨범의 전체적인 통일성과 완성도가 뛰어나다는 평을 받았다. 박진영이 타이틀곡 제작에서 손을 뗀 2016년 싱글앨범 <Why so lonely>에서는 레게팝과 70년대 밴드 사운드, 팝 록 장르의 곡을 수록하는 등 복고의 메인컨셉을 유지하지만 현대적으로 곡을 소화해내는 그룹이 되었다. 모든 곡을 멤버들의 자작곡으로 채우며 음악평론가들의 극찬까지 받았고, 가온차트 7월간 1위에 이어 3분기 1위까지 하면서 아직 원더걸스의 음악과 무대가 매력적임을 증명해 보이며 활동을 마무리 했다.



원더걸스는 일명 '삼촌팬'이라 불리는 가요계에 존재하지 않던 소비층을 TV와 음반매장으로 다시 이끈 걸그룹이며, 10대부터 20대는 물론 삼촌팬까지 코어 팬층으로 흡수했고 음악 자체는 어린아이, 할머니, 할아버지 말그대로 남녀노소 에게 폭 넓게 사랑받았다. 원더걸스의 강력한 무기는 음원성적인데 데뷔부터 해체전까지 음방나 방송 점수가 나 걸그룹보다 떨어졌더라도 1위에 항상 후보에 오른 이유는 오로지 음원 성적 하나 때문이었다. 


 

원더걸스의 계약만료를 앞두고 나온 몇몇의 기사를 통해 원더걸스의 해체는 사실상 예측되어 왔었다. 만료 3개월 전인 지난해 11월 재계약 관련하여 멤버간 논의를 할 예정이었으나, 멤버 유빈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투병생활을 하시게 되어 유빈이 슬픔 속에서 간병을 하는 상황이 되었었고, 그 다음달인 12월 22일 결국 부친상을 겪으며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른 기획사들과 이미 접촉을 진행했던 다른 멤버들도 재계약에 관해 확답하지 않았다고 전해졌다. 하지만 일부 멤버들이 다른 기획사랑 계약 관련하여 '접촉'을 했다는것은 'JYP를 떠날 가능성이 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었고, 지난 1월 12일  JYP 사옥에 걸린 원더걸스의 사진이 빠지고 신인 그룹의 포스터가 걸린 것이 확인됐다. 원더걸스의 사진이  JYP 사옥에서 사라진 것은 10년 만의 일이었다. 이로써 전원 재계약의 가능성이 낮은 것일지 모른다고 추측 되어왔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 하여 활동한 아이돌이 많았던 만큼 비슷한 시기에 재계약을 진행하는 아이돌이 많아지면서 최근 많은 그룹들이 기억속으로 남게되었다. 하지만 최고의 자리에 올라 도전하고 좌절하고, 멤버교체와 변화를 두려워 하지않고 꾸준하게 10년을 지켜온 원더걸스를 다시 한 무대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10년의 내공이 있는 멤버들이니 만큼 앞으로 어떤 행보를 이어갈지 기대하며 그동안 고생한 원더걸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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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의 연애 끝에 배우 김태희(37)와 배우 겸 가수 비-정지훈(35) 이 2017년 1월 19일 웨딩마치를 올렸다.

2011년 소셜커머스 회사의 광고를 함께 촬영을 하며 인연을 만들어간 두 사람은 2012년 가을 연인으로 발전했고, 2013년 1월 1일 두 사람의 열애사실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공식 커플임을 인정한 두사람으로 인해 새해부터 떠들썩 했었다. 비는 광고 촬영장에서 첫 눈에 김태희 일명 태쁘에게 반했다고 한다. (물론, 반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만...) 군입대가 일주일 밖에 남지 않았음에도 비는 적극적으로 본인의 진심을 김태희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보통은 군대에 입대하기전에 마음에 드는 여자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본인의 입대와 국방의 의무를 해야하는 이 나라를 탓하며 포기하고는 하던데, 입대를 앞두고 보인 이러한 비의 행동은 보통의 남자분들은 더욱 공감하겠지만 상당히 용기있는 행동인 것 같다. 역시, 용기있는 자만이 미인을 차지하는 것이 진리인가 보다.


비는 군입대와 제대 후 연예병사와 관련 된 부정적인 이슈들과 조금 뜸한 연기와 가수 활동을 보이면서, 글로벌 스타로 활동하던 예전보다 못하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고, 김태희 역시 2015년 SBS 드라마 용팔이 이후 국내 드라마나 영화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고 행사나 CF정도로만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 해도 이 두사람이 대한민국의 대표 톱스타 인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현재도 두사람의 결혼에 관한 모든 것은 화제이며 이슈를 몰고 다니고 있다. 나 역시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두 사람은 그동안 조용히 데이트를 즐기곤 했다. 데이트 목겸담이 각종 매체 많이 올라오기도 했고 비의 절친한 친구인 빽가의 인스타그램엔 빽가가 운영하는 강남의 음식점에 다녀간 인증사진을 올리기도 했다. 또 김태희는 매거진 인터뷰에서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 싸워도 보고 힘든일도 겪었는데 인성이 좋고 따뜻하다. 우선 대화가 잘 통해요. 성향이 잘 맞고 공통된 화제가 많아서 만나면 정말 재미있다."고 말했고, 비 또한 "너무나 은혜로운 사람이고 모든것에 기준이 된다. 떨어져 있어도 가족이다."라며 김태희를 이미 가족이라 표현한 인터뷰도 있어왔다. 









비 (정지훈/Rain) - 가수, 영화배우


1982.06.25 / 개띠 / 게자리 


소속 ㅣ레인컴퍼니


185cm / 74kg / O형


학력 ㅣ단국대학교 대중문화예술대학원


천주교


1998년 그룹 '팬클럽' 으로 데뷔






김태희 - 탤런트, 영화배우


1980.03.29 / 원숭이띠 / 양자리


소속 ㅣ 루아엔터테인먼트


162cm / 45kg


학력 ㅣ 서울대학교 의류학 학사


천주교


2000년 '화이트' CF 로 데뷔




김태희와 비는 연상연하 커플로 두살 차이가 나고 두사람의 신장은 23cm가 차이가 난다. 체격의 차이로만 보자면 비는 듬직한 오빠같은 느낌이 든다. 

연상연하 커플이 그다지 특별하지 않은 시대이지만 이러한 외형적인 느낌때문에 김태희가 연상이라는 것에 아차 하는 기분이 드는 점을 공감 할 것이다.

두 사람의 결혼식에 대해서 포스팅 하게 된 이유는 바로 위의 저 사진이다. 성당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린 두사람은 비공개라는 말그대로 결혼식 자체를 조용하게 치뤘다. 그래서 많은 사진이 나오고 있진 않지만, 저 사진을 유독 한참 들여다 보게 되었다. 김태희를 따라서 비의 종교도 천주교가 되었다고 들은것 같은데, 합장을 한 두손과 꼭 감은 두눈에서 진심으로 사랑과 행복과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비의 신곡 '최고의 선물'이 발표되고 활동을 시작하였을때, 주변 사람들이 이건 분명 김태희에게 프로포즈를 하기 위한 음악이라는 추측을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1월 15일 신곡이 발매된 지 이틀이 지난 17일에 비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자팔 편지로 결혼소식을 알렸다. 



[비의 결혼발표 자필편지 전문]


안녕하세요... 추운겨울 모두들 건강하신지요?

정지훈 입니다.

어느덧 제가 데뷔한지도 1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저와 함께 했던 많은 팬 여러분들 또한 예쁜 숙녀로 혹은

한 아이의 엄마로 훌륭하게 변했습니다.

이제 저 또한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훌륭한 남편이자 남자가 되려 합니다.

그녀는 제가 힘들때나 행복할때나 변치않고 늘 제곁을 지켜주며

언제나 많은 것들로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제 신뢰가 쌓이고 사랑이 커져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결혼식과 시간은 현재 시국이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최대한 조용하고 경건하게 마무리 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말씀못드리는점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지난 16년동안 여러분들의 사랑에 감사했습니다.

앞으로는 더욱더 책임감있고 겸손한 모습으로 멋진 가수와 배우로서

좋은 모습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저에게 최고의 선물 입니다."


2017.1.17





다음은 비의 자필 편지가 올라온 후에 비의 편지를 바탕으로 작성한 듯한 김태희 소속사에서 올린 공식입장 전문이다.



김태희 소속사의 공식 입장


안녕하세요 루아엔터테인먼트입니다.

배우 김태희씨와 정지훈씨가 서로의 가장 소중한 반려자로 연을 맺을 시기이기에 현재까지의 상황을 말씀드립니다.

그동안 연인으로서 사랑을 키워오며 마음과 신뢰가 쌓여 드디어 너무도 아름다운 결실을 맺게 되었습니다.

현재 시국이 불안정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이기에 결혼식은 최대한 조용하고 경건하게 천주교 성사로 진행할 예정이며,

양가 부모님들과 본인들의 뜻에 따라 시간과 장소를 공개드리지 못함을 죄송스럽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립니다.

양가 부모님들과 가족분들만 모시고 작고 뜻깊게 올릴 것이며 예식 후 신혼여행은 아직 구체적으로 계획하지 않고 있습니다.

결실의 아름다운 선물인 자녀는 혼인 후에 천천히 계획할 예정입니다.

많은 분들의 사랑과 관심에 감사드리며 모범적인 부부로 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다른 여러가지 궁금하실 내용들은 상황마다 정리되는대로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요.


루아 엔터테인먼트 올림.







비의 편지는 담백하지만 진심이 담겨있었다. 오랜 연애 기간만큼 진득하고 진실된 느낌이다. 힘들때나 행복할때나 변치 않고 본인의 곁을 지켜주며 언제나 많은 것들로 감동을 주었다는 부분과 신뢰가 쌓여 결실을 맺는다는 부분에서 은은하게 미소가 나온다. 위의 사진에서 보여준 내가 받은 느낌처럼 편지를 통해서도 왠지 이 두사람 아름답게 잘 살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모두가 주목하는 부부인만큼 내적으로 외적으로도 귀감이 될 수 있는 좋은 부부가 되길 축복한다.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오드리 헵번 (Audrey hepburn) , 아름다움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그녀의 일생


- 진정한 비욘드 뷰티를 보여준 그녀의 삶







1993년 1월 20일.

아름다운 그녀 오드리 헵번은 스위스 톨로 체나스에서 63세의 나이로 우리곁을 떠났다.

내년이면 그녀와 이별한지 25주기가 된다.

세월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아름다움이란 말은 오드리 헵번을 두고 한 말일까.

외면과 내면의 아름다움을 조화롭게 이루어 낸 아름다움의 진정한 아이콘, 나의 뮤즈, 오드리 헵번











1. 오드리헵번의 어린시절


영국인 아버지와 네덜란드 유서깊은 귀족출신 엄마 사이에서 1929년 5월 4일 벨기에 블리쉘에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비교적 내성적이었던 오드리헵번은 5살때 영국 기숙사 학교로 가면서 발레와 음악을 접했다. 어린나이에 엄마와 떨어져 지내며 생긴 그리움과 서툰영어, 통통한 몸으로 운동도 잘하지 못해서 받은 따돌림들을 극복해 내며 점차 독립심이 강한 꿈많은 소녀로 성장하고 있었다. 

발레리나를 꿈꾸며 자라던 그녀나이 10살무렵. 세계 2차 대전이 터지면서 그녀는 네덜란드로 피난을 가게 되었다.

그 당시 아버지 안소니 헵번은 독일 나치에 적극 동조하며, 가족을 버리고 떠났고, 

그녀의 오빠들 역시 독일군에게 끌려갔으며 그녀를 아끼던 이모부도 죽임을 당한다. 

전쟁으로 인해 붕괴 되어버린 가족, 피난민의 처참한 아픔과 충격과 배고픔을 견뎌내야 했다.

( 그녀가 배우일 때 '안네의 일기' 영화 캐스팅 제의를 받고 악몽에 시달리며 거절했다고도 전해진다) 

전쟁기간동안 집안에 숨어 수개월을 튤립뿌리를 먹으며 연명하던 그녀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천식,부종,황달,빈혈,자궁내막증등 각종 합병증을 얻었고

일부는 평생을 안고 가야했다. 오드리헵번은 유니세프의 도움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발레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170cm의 큰 키와 좋지 않은 건강상태는 꿈에 제약이 되었다.

발레리나의 꿈을 접고 그녀는 암스테르담에서 모델로 활동하며, 파리와 런던에서 연극과 영화의 단역배우로 출연하기 시작했다.



2. 오드리헵번의 배우활동


1952년 뮤지컬 <GIGI(지지)> 의 작가가 오드리헵번을 발견하였고, 감독에게 그녀를 여주인공으로 해달라고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캐스팅이 된다.

그후 1953년 <로마의 휴일>의 여주인공역에 발탁되어 세계적 인기를 누리게 된다. 오드리햅번의 캐스팅은 무명이었던 그녀에겐 엄청난 기회였다.

예정 되어있던 감독도 여러번 계속 바뀌고 예산도 축소되고 인기배우들의 스케줄도 맞지 않아 캐스팅된 첫 주연작 <로마의 휴일>은 그녀에게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안겨주었다. 이후, 1954년 그녀는 <사브리나>에서의 여주인공 역할도 훌륭하게 소화해 내어 다시한번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 후보에 오르는 등 그녀의 인지도는 더욱 높아갔다. <사브리나> 출연 후 그녀는 영화가 아닌 브로드웨이 연극 <운디네>에 물의 요정 역할로 출연했고, 연극의 아카데미상이라 할 수 있는 토니상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그저 예쁜 배우가 아닌 연극 배우 출신의 정체성을 굳혔다.

1957년 발레리나를 꿈꾸던 그녀의 경험과 노래실력을 살린 뮤지컬 영화 <화니페이스>에 출연했고, 그녀는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중에 본인의 실제 성격과 가장 비슷한 영화로 <화니페이스>를 뽑았다고 한다. 1961년, 시대의 아이콘으로 입지를 굳힌 작품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홀리 고라이틀리 역을 맡았다.  블랙 드레스와 선그라스 진주목걸이와 티아라, 긴 장갑를 하고 쇼윈도우 앞에서 화려한 보석을 감상하며 커피와 도넛을 먹는 모습은 현재도 명장면으로 꼽힌다. 1964년 <마이페어레이디>에서 거리에서 꽃을 팔던 아가씨에서 우아한 여인으로 변모하는 역을 맡아 다시한번 그녀의 매력을 뽐냈다. 그녀는 1967년까지 겨우 15번의 배역을 맡았고 1960년 <어두워질때까지> 이후 영화 출연을 줄여가다 1989년 <영혼은 그대곁에>를 끝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3. 오드리헵번의 외모와 스타일


관능적이고 섹스어필하는 글래머 여배우들이 인기가 지배적이었던 당시에, 그녀는 마른 몸에 고전적인 얼굴과 지적인 이미지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당대 최고의 아름다운 여배우로 꼽히며, 현재까지도 여러 광고에 쓰일 정도로 미의 상징 자리를 지켜오고 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외모 컴플렉스가 있었다고 한다. 지인들에게 "나는 피부도 좋지 않아서 화장을 하지 않으면 볼품이 없고, 얼굴도 각지고 콧등도 매끄럽지 않으며 이런 외모로 영화배우가 될 수 있을거라고 생각조차 못했다."고 말한적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의 마른몸은 여성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녀의 헤어스타일과 옷차림등 그녀의 스타일은 꾸준히 회자된다. 데뷔 작품인 <로마의휴일>에서 선보인 헤어컷도 "헵번스타일"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사브리나>에서는 영화배우 최초로 특정브랜드에서 의상을 협찬받았는데, 이때 협찬한 브랜드가 지방시(Givenchy)이다. 지방시는 이때 얻은 광고효과로 세계적인 패션브랜드로 성장했으며, 이 후 오드리헵번에게 의상협찬을 적극 지원했다. 그녀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티파니에서 아침을> 에서 입은 그녀의 시그니처 블랙 드레스도 지방시의 드레스이다. 배우로 활동한 시기의 오드리헵번은 말그대로 유행의 선두주자이자 당대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이 사랑한 배우이기도 했다. 



4. 오드리헵번의 러브스토리



영화계에서의 배우로 지낸 삶은 성공적이었지만, 그녀가 항상 바래왔던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삶은 다소 성공적이지 못했다. 결혼 전 약혼했던 제임스 핸슨과는 그녀가 유명세로 바빠지자 헤어지게 되고, 이후 1954년 세번째 와이프를 버리고 네번째 결혼을 하는 바람둥이 멜 펠러와 결혼한다. 오드리헵번은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 등 거장들의 캐스팅 제안을 거절하고 남편이 감독하는 영화에 출연하는 등 그를 사랑했지만, 정작 멜펠러의 바람기와 오드리헵번을 향한 그의 열등감으로 잦은 다툼을 했고, 첫 번째 임신 중에 촬영 중 낙마사고를 당해서 유산이 된 후에 자주 유산을 하게되었고, 결혼 생활 말년에는 그녀에게 폭력까지 휘둘렀다고 한다. 오드헵번은 그녀의 첫째 아들 '션 페러'를 얻고 1968년 이혼했다. 약 2년여 세월이 지나 그녀는 새로운 사람과 결혼했다. 

그녀와 두번째 결혼을 한 9세 연하의 이탈리아 정신과 의사인 '안드레아 도티'는 22세때 시대의 아이콘으로 영화 촬영을 하던 오드리헵번에게 다가와 악수를 건냈던 14세 소년이었다. 전성기의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사랑했던,  '나중에 꼭 오드리헵번과 결혼하겠다'고 말하던 그는 중년이 된 평범한 엄마와 부인을 꿈꾸던 오드리헵번을 원하지 않았다. 평범한 여인의 오드리헵번이 아닌 배우 오드리헵번을 사랑했던 것이다. 그의 외도 또한 번번히 가십기사로 다뤄졌다. 1979년 두번째 아들 '루카 도티'를 두고 결국 이혼한다. 두번의 이혼을 겪은 그녀는 모든 영화계 생활을 접고 온전히 두 아들에게 집중했다. 이혼 후 유니세프 대사로 활동한 그녀는 간간히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유명세를 세계구원에 적용하기 위해서 였다. 도티와의 이혼 후 구호 활동 시기에 진정한 소울메이트인 네덜란드 배우 로버트 월더스를 만났다. '결혼이 그 어떤것도 추가하지 못할 만큼 사랑으로 충만하다'고 말하던 둘은 결혼은 하지 않았고 그는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곁을 지켰다.




5. 오드리헵번의 유니세프 활동과 생의 마지막 



은퇴와 이혼이후 오드리헵번의 구호활동은 자발적으로 이루어진다. 자신의 인기와 명성을 누군가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기뻐했다. 

유니세프 대사로 인권운동과 자선사업 할동에 참여하여 제3세계 오지 마을에서 아이들을 도왔으며, 구호 지역의 많은 생명들을 돕는데 힘썼다. 그녀의 활동들은 외모보다 아름다웠다. 60세를 바라보던 그녀는 오지,전장,전염병 지역 그 어디든 유니세프가 원하는 곳이면 열성적으로 찾아갔다. 구호 메세지를 알리기 위해 배우 시절에도 잘 하지않던 인터뷰를 자청했고, 그녀의 활동들은 전 세계인들에게 구호활동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했다. 1992년 9월 소말리아 방문 전 부터 오드리헵번의 건강은 적신호였다. 나이를 고려하지 않고 진행한 무리한 일정들에도 진통제로 고통을 참아내며 소화했다. 소말리아에서 돌아 온 이후에 구호 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행사중에도 진통제를 달고 지냈다. 결국 11월 그녀는 직장암 진단을 받았고 수술했으나 경과는 좋지 않았다. 그녀에게 주어진 남은 시간은 3개월, 그녀는 오랫동안 살았던 스위스의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마지막 생을 고요하게 보냈다고 한다. 오드리헵번은 사랑하는 가족과 로버트 월더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1993년 1월 20일 63세로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정열적이고 진심어린 구호활동은 민간 구호 단체와 유니세프가 함께 제정한 '오드리 헵번 평화상'을 통해 그 뜻이 이어지게 되었다.



6. 아들에게 남긴 시 (개인적으로 이 시는 정말 아름답다)


Time Tested Beauty Tips

세월이 일러주는 아름다움의 비결


For attractive lips, speak words of kindness.

매혹적인 입술을 가지고 싶다면 친절한 말을 하라.


For lovely eyes, seek out the good in people.

사랑스러운 눈을 가지고 싶다면 사람들의 선한 점을 보아라


For a slim figure, share your food with the hungry.

날씬한 몸매를 가지고 싶다면 배고픈 자와 음식을 나누어라.


For beautiful hair, let a child run his fingers through it once a day.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지고 싶다면, 하루 한번 어린이의 손가락으로 그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게 하라.


For poise, walk with the knowledge you'll never walk aone

아름다운 자세를 가지고 싶다면, 결코 그대 혼자 걸아가는 것이 아님을 알도록 하라.


People, even more than things, have to be restored, renewed, revived, reclaimed and redeemed and redeemed..

재산 보다는 사람들이야 말로 회복되어야하고, 새로워져야 하며, 활기를 얻고, 깨우쳐지고, 구원받고 또 구원받아야 한다.


Never throw out anybody.

Remember, if you ever need a helping hand. you'll find one at the end of your arm.

누구도 내버리지 말라.

기억하라.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때 그대는 자신의 손 끝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으리라.


As you grow older you will discover that you have two hands.

One for helping yourself, the other for helping others.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대의 손이 두개이 이유가

하나는 자신을, 하나는 다른이를 돕기 위해서 임을 알게 되리라.



오드리헵번의 유언으로 전해지고 있는 이 글은 시인 샘 레벤슨(Sam Levenson)의 시이다.




7. 오드리헵번의 영향력




2014년 5월 4일 구글에서 오드리헵번의 탄생 85주년을 기념하며 기념일 로고를 제작했다.

2014년 11월 29일부터 2015년 3월 8일까지 오드리헵번의 생애 전체를 보여주는 전시회가 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열렸다.

그녀의 둘째아들 루카 도티는 <오드리헵번 어린이재단> 회장을 맡고 있으며, 그는 헵번이 출연한 영화의 소품, 의상, 생전 물품들을 전시하는데 주관했다.

그녀의 첫째아들 션 페러는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먼 나라의 비극에 발벗고 나서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세월호 기억의 숲'을 조성을 제안했고,

304명의 희생자를 낸 4.16 세월호 참사를 기리기는 '세월호 기억의 숲'은 2016년 전남 진도군 팽목항으로 부터 4.16km 떨어진 곳에 완공 되었다.


우리가 기억하는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과 화려한 패션 뿐 아니라 자신이 받은 전세계인의 사랑을 살아서도 죽어서도 

되돌려 주고 있는 진정한 비욘드 뷰티이자 찬란한 별이다.

감히 말하건데 사랑과 나눔을 실천한 그녀의 아름다움이여 영원하리라..


사진기반의 다양한 각종 SNS에 피로감을 느끼던 랭자. 이 곳 티스토리에 새로운 나의 공간을 만들었다.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지만 요즘들어 부쩍 더 궁핍한 기분이 든다.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모습에만 집중하고 있는 삶을 살고있는 것은 아닐까? 혹시 나를 잃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등등의 회의감이 잔뜩 섞인 오랜 고민들로 나에게 집중하는 작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어떤 매체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데 스타일리스트 <서은영>이라는 사람을 알게 된건 대략 10년 전 쯤으로 기억한다. 대학교를 휴학하고 그냥 나로 살기에 집중했던 그때세상에 오직 나 하나만 내놓고도 당당했던 그때. 오히려 그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미쳐있었다. 나만의 세계가 있는 듯 자유로웠고 거침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아마도, 오드리햅번,코코샤넬의 삶이나 클래식한 무드, 진주목걸이 였었던 듯) 서은영님 과 나만의 교집합이 생겨났고 그 영향으로 나중에는 서은영님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하게 되었다. 자연스러운 시작이었고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스타일북1><스타일북2>는 물론이고 <서은영이 사랑하는 101가지> 는 여전히 나의 교과서이다.

 


아름다운 사람 카테고리를 채워줄 첫 주인공은 누가 좋을까지극히 주관적인 관점으로 주인공 간택이 시작됐다

평소 좋아하던 인물은 기본이고 (주로 여자더라) 무언가 다시 한번 영감을 주는 사람이면 더할 나위 없겠다 싶었는데, 책장에서 서은영님 이름을 발견했다. 한때는 내 싸이월드 방명록에 답글도 남겨주시곤 했는데 정말 요새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했다

그리운 마음을 담아서 검색창에 서은영님의 이름을 검색했다. 

이제는 스타일을 넘어 삶의 철학까지 담긴 HEREN 매거진의 최근 인터뷰를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으로 읽어 가다보니 역시나 이 분은 나의 뮤즈였다. 더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나의 스타일 멘토, 서은영 님 







이름 : 서은영 (크리에이트베티대표)


現)신세계 인터내셔날 JAJU 브랜드 컨설턴더

現) CJ오쇼핑 - BE_GE 브랜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에디터 - 바자,엘르 에디터와 칼럼 기고

      

광고 - 맥심, 삼성카드, 국민은행, 제이에스티나, 로만손, 신라면세점, 컨버스, 샤프란, 빈폴, 현대백화점, 

롯데백화점, 라끄베르, 라네즈, 롯데카드, 랑콤, 삼성자동차 등


스타일링 셀러브리티 - 김연아,김완선,김나영,강소라,전지현,알리,장진영,고현정 등


영화포스터 - 결혼전야, 조선미녀삼총사, 도둑들, 도가니, 늑대소년, 은교, 피에타, 후궁, 방자전, 시라노연애조작단, 인사동스캔들 등


전시 - 패션디자이너 노라노 60주년 전시, GS SHOP 2012 WINTER COLLECTION 등


브랜드 컨설팅 - Maiage de MIE, MCM Hongkong, BiBigo 등


방송 - 올리브채널 올리브쇼 진행


도서 - 스타일북1,스타일북2,베티에게 물어봐, 서은영이 사랑하는 101가지,세상견문록







스타일에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이름 <서은영>

고소영,고현정,김민희,전지현 등의 전속 스타일리스트, 패션컬럼,TV쇼,도서발간 등으로 한참 전성기라 불리는 시기에

유행과 트렌드 속에 사는것과 에르메스 버킨백에 스니커즈를 신는 뻔한 법칙들이 재미없어져서

스타일리스트일은 그만두고 온세계를 분주히 돌며 사람들과, 여자의 아름다울수 있는것에 집중했다고 한다. 정말 매력적이지 않은가.

나는 아직 현실로 이루고 있지 못하지만 정말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이며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현재는 크리에이트베티 라는 법인을 운영하고 계신다. 

'폴라스콥' '베리 빅' '쓰리 리틀 플라워' 로 나뉘는 여행,디자인,자연으로 나뉘는 웹사이트 프로젝트를 런칭할 예정이라고 한다

'베리빅(berrybig)'은 현재 운영중인데 역시나 흥미로우며 서은영님 다웠다.



베리빅101 'THANK U' 에 담긴 서은영님의 메세지가 바로 이 곳의 Identity 인것 같아서 가져와봤다.







BERRY BIG


이스라엘부터 인도, 터키, 이집트, 피레네 산맥 부근과

로키 산맥, 둔황을 지나 실크로드, 그리고 러시아를 거치며

가장 가고 싶어진 곳이 바로 대한민국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난 내 나라가 부끄러웠던 적도 있었습니다만 정말 궁금해졌습니다.


"어떻게 생겼을까?"


파리에서 노천카페에 앉아 있거나

런던의 테이트 모던, 뉴욕의 바니스 뉴욕에서

쇼핑을 하는 것이 정말 신이 나고 즐거웠던 적도 있지만

세상의 끝을 돌아다니면서 자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깨닫게 되자

내가 태어난 곳이 알고 싶어진 것입니다.


그러자 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리고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서울과 부산은 물론, 삼척과 태백, 통영과 거제도,

해남과 보길도, 예산과 횡성 등에서 만난 분들.

그들은 나무 공예를 하고 가구를 만들고, 차를 찌고,

고운 꽃잎으로 염색을 하는 분들부터

사진작가, 요리 연구가, 디자이너 들이었습니다.

세상은 모두 값비싼 해외 명품 브랜드로 가득합니다.

명품은 비싼 것이 명품이 아닙니다.

자신의 철학과 개성, 그리고 꿈이 들어가야 합니다.


여러분! 스타일은 사치가 아니고 취향이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진정한 멋과 철학을 가진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취향은 돈으로 살 수 없습니다.

스타일은 도전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베리빅과 함께 자신의 취향을 만들어 보세요.

열심히 꿈을 쫒는 사람들을 도와주세요.


포도는 가뭄이나 어떠한 조건에서도

뿌리를 깊게 박은 나무에서만이

크고 아름다운 포도송이를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BERRY BIG은 여러분을 응원합니다.







자신의 철학과 개성, 그리고 꿈이 담긴 그것이 명품이고, 스타일은 사치가 아닌 취향이며 취향은 돈으로 살 수 없다.


헤렌매거진에서 서은영님은 내가 좋아해서 입고, 먹고, 나 스스로 디자인 하는 삶이 중요하며, 자신의 삶은 스스로 디자인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 자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을 놓치고 살고 있는 삶에 회의를 느끼고 나만의 색깔을 잃어가는 것이 슬퍼져서

묶여있던 것들을 하나씩 내려놓고 나만을 위한 공간과 나를 표현하기 위한 작은 것들을 소소히 준비하고 있는 랭자에게는

개정판 교과서에 담긴 정답같은 문장이며 네비게이션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만나뵙고 이야기 나눠보고 싶다.  서은영님 정말 존경하고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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