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디크 diptyque 열정과 상상력을 담은 '마법의 향수'

브랜드 스토리 / 프랑스의 향수 브랜드 '딥디크' 

 

 

 

 

 

 

 

프랑스 말로 '2단 접이식 목판화'을 의미하는 딥디크는 접혀있던 화판을 열었을때 하나의 스토리를 보여주는 두 개의 그림이 나오는 예술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이름입니다. 프랑스 파리의 생제르맹 매장의 창문 디자인을 2단 접이식 화판처럼 만든 것도 삽화, 디자인, 인테리어 등을 아름답게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타인과 차별화 된 천연의 향을 취향에 맞게 사용 할 수 있는 니치(Niche)향수 시장이 성장중인데, 

오늘은 니치향수의 대표이자, '전 세계의 상류사회가 선택한 비밀의 향수' 딥디크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프랑스 파리 생재르맹 34번가 딥디크매장 / 출처 딥디크 한국 수입사

 

 

 

1961년 프랑스, 파리 생재르맹 34번가 모퉁이.

영국 출신의 화가 데스먼드 녹스 리트무대 디자이너 이브 쿠에랑건축가 크리스티앙 고트로가 모인 작은 패브릭 부티크에서 딥디크의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처음에는 직접 만든 아름다운 패턴의 패브릭을 제작해서 팔았습니다.

 

"우리는 돈을 좇기보단 열정과 상상력을 좇았고 진정한 예술 작품을 만들고 싶어 의기 투합했다." -크리스티앙 고트로

 

 

 

이브 쿠에랑(좌), 크리스티앙 고트로(중), 데스몬드 눅스-리트(우) / 출처 Diptyque

 

 

 

딥디크 부티크에 온 고객들은 원단보다 손재주와 눈썰미가 뛰어난 세 명의 창업자가 직접 만들거나 세계 각지에서 수집해 놓은 인테리어 소품들에 큰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 당시는 편집숍이 생소한 개념이라 오히려 핫플레이스가 되었습니다. 특히 영국에서 수입한 향초와 포푸리(꽃잎, 나뭇잎, 나무껍질 등을 말려 쟁반 혹은 천주머니에 담아 놓은 것)를 찾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이후 이들은 직접 향초 제작에 나섰습니다. 1963년 화려하거나 인위적인 향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포푸리향의 3종의 향초를 내놓았는데 불티나게 팔렸지만 '파리 5월혁명' (68혁명) 이라는 대대적인 학생운동으로 손님의 발길이 끊기고, 패브릭이 팔리지 않으면서 생긴 자금난의 어려운 상황에 닥치며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1968년 계피,나무,꽃, 정향 등 다양항 향기를 느낄수 있는 딥디크의 첫 향수 '로(L'eau)'가 출시 되었습니다. 이 후 1973년, 1975년에 향수를 추가로 출시하였습니다.

 

 

 

 

딥디크가 첫 출시했던 3가지 향초 (현재도 판매중) / 출처 diptyque

 

 

이렇게 세 개의 향수가 모두 성공한 후에 딥디크는 향 사업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패브릭과 인테리어 소품들을 모두 정리합니다. 이후 세계적 조향사들과 협업을 하며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딥디크만의 향을 만들어 냈습니다.

 

 

 

 

딥디크의 베스트셀러 '도손'은 쿠에랑이 어린시절 하롱베이 도손의 바닷가에서 보냈던 시절을 떠올리며 내놓은 향수입니다. 튜베로즈, 오렌지 블러섬, 재스민 등으로 이루어졌는데 해풍을 따라 느껴지는 은은한 향신료향과 꽃향기의 느낌을 표현했습니다. 튜베로즈는 1년에 딱한번 피우는 꽃인데 이 자극적인 꽃향기를 다른 자연의 향들과 조화시켜 바닷바람에 일렁이는 꽃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쿠에랑의 또 다른 걸작이자 또 하나의 베스트셀러 인 '탐다오'는 동남아시아의 숲과 산에서 착안한 향수입니다. 습하게 불어오는 공기를 머금은 저녁 바람의 향기. 그 속에서 느껴지는 샌들우드, 신선한 사이프러스향 등을 떠올리며 제작했습니다. 마이조르 샌들우드, 사이프러스, 백향목 등에 지중해 식물인 머틀을 더해서 송진의 향과 어우러지도록 했습니다. '탐다오'의 향을 처음 맡을 땐 자극적이면서도 신선한 과일과 폭포도 연상된다고 합니다. 

 

 

 

딥디크 diptyque 도손 doson

 

 

 

 

패브릭에서 인테리어 소품, 향초와 향수까지 딥디크에는 여러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한가지는 지켜왔습니다. 바로 자유로운 갊과 진정성 있는 디자인 이었습니다. 자유로움과 진정성은 딥디크를 딥디크 답게 유지시켰습니다. 딥디크는 트렌드나 소비 패턴에 대한 분석은 하지 않습니다. 돈이나 야망등의 상업적인 것보다 꿈과 상상력, 자유롭고 창의적인 진실로 아름다고 좋은 제품을 만드는 것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현재는 규모가 커져 런던의 사모펀드에 인수되어 세계적으로 확장된 딥디크는 파리와 런던 뉴욕 등 9시 도시에 17개 부티크 매장을 운영중이며, 국내에도 성공적인 런칭은 물론 40여개 국가에 진출해 700여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딥디크의 철학은 변함 없이 유지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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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클리프 아펠 Van Cleef & Arpels

 

이 브랜드의 이름이 생소하신 분들도 아마 활짝 핀 네 잎 클로버와 로맨틱한 나비를 모티브로 한 형태의 주얼리는 익숙한 분들이 많으실 텐데요. 오늘은 1896년에 설립된 프랑스의 명품 브랜드 반클리프 앤 아펠 (Van Cleef & arpels)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반클리프 아펠은 전설적인 고객들에게 시간이 지나도 결코 퇴색하지 않을 독특한 창작 주얼리를 제공해왔습니다. 각각의 제품은 저마다 놀라운 사연이 담겨있는 작품이라고 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사연은 당연 반클리프&아펠이 탄생하게 된 아름다운 러브스토리 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 이야기는 반클리프 아펠의 공식 홈페이지의 <반클리프 아펠의 전설> 페이지 중에서 가져왔습니다.


에스텔과 알프레드: 반클리프 아펠을 탄생하게 한 러브스토리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반클리프 아펠에게 영감을 주는 것은 사랑에 잠재되어 있는 고유의 창조적 에너지입니다.

사랑이 아니었다면 메종 반 클리프 아펠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19세기에 저물어가던 시절, 보석상의 딸이었던 에스텔 아펠(Estelle Arpels)이 알프레드 반 클리프(Alfred Van Cleef)라는 스톤 커터 공의 아들을 만납니다.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러브스토리, 상상을 초월한 위대한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에스텔 아펠 & 알프레드 반 클리프, 1895년 / 출처 반클리프아펠

 

두 사람은 1895년에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뜨거운 열정, 개척 정신, 화목을 중시하는 가족 윤리 그리고 프레셔스 스톤에 대한 열정에 이르기까지 젊은 연인에게는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두 사람에게는 무엇보다도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무언가를 함께 창조하고 싶다는 의지와 영감으로 가득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의지가 메종 반 클리프 아펠을 탄생하게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공유하고 있던 열정, 헌신, 믿음, 아름다운 것에 대한 탐닉이 반클리프 아펠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사랑의 도시 파리, 그중에서도 가장 번화한 중심가, 방돔 광장에 첫 부티크를 열었습니다.

 

프랑스 방돔 광장 반클리프 앤 아펠 부티크 과거와 현재 / 출처 반클리프아펠

 

 

 

1906년, 알프레드는 에스텔의 오빠인 샤를과 함께 사업을 시작했고, 세일즈 능력이 출중했던 샤를이 파리 방돔 광장의 부티크를 운영하였습니다. 2년 뒤, 에스텔의 오빠 줄리앙이 합류하였고, 1912년에는 셋째 오빠인 루이까이 비지니스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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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찰스아펠 2.줄리앙 아펠 3. 루이아펠 /출처 반클리프아펠

 

그 후 그들은 수년의 세월 동안 반클리프 아펠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얼리의 대명사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메종의 성공과 더불어 에스텔과 알프레드를 하나로 결합시켜 주었던 사랑은 지금까지도 반클리프 아펠의 수많은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 안에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반클리프&아펠은 파리로 몰려든 러시아의 귀족들과 미국의 부자들에게 크게 환영받았습니다.

이후 반클리프&아펠 부자들이 모여 사는 리비에라와 비아리츠, 비시 등의 해변의 리조트들에도 가게를 냈습니다.

도비유 해변가의 새로 연 가게에는 슬라보리진 대공과 인도부자 라자 그리고 수많은 귀족들과 화가, 정치가들이 단골손님이 되면서 날로 번창했습니다.

 

1925년 반클리프 아펠은 파리 공예 작품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습니다. 기하학적 작품들이 대상을 받진 못했지만 활짝 핀 꽃 모양의 브로치가 각광을 받았습니다. 두 송이 장미인데 한 송이는 다이아몬드로 또 한 송이는 루비로 만들었다. 잎사귀와 줄기는 에메랄드로 가장자리는 검은색 에나멜로 장식했습니다.

 

푸시아 클립, 플래티늄, 미스터리 세팅 루비, 라운드, 페어형, 바게트 컷 다이아몬드 < /출처 반클리프아펠 영상캡쳐>

1933년 독창적이고 헌신적인 '미스터리' 세팅 기술을 탄생시켜 장인정신과 예술성을 결합시킨 주얼리를 선보였습니다.

 

 

반클리프 아펠은 왕족의 러브스토리에 자주 등장합니다. 아마도 사랑의 에너지로 시작한 브랜드이기 때문일까요? 영국의 에드워드 8세인 윈저 공과의 러브스토리로 유명한 윈저 공작부인인 윌리스 심슨은 반클리프 아펠의 '크라바트' 목걸이를 특별히 아꼈습니다.

 

1955년 모나코 왕비 그레이스 켈리가 약혼식에서 착용한 진주 목걸이도 반클리프 아펠이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반클리프 아펠은 모나코 왕국의 공식 보석상으로 지정되기도 합니다.

 

네 잎 클로버 형태의 '알함브라' 목걸이는 1970년대 활동했던 샹송 가수 프랑수아 아르디가 착용하여 프렌치 시크룩의 빠질 수 없는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행운을 얻기 위해서는 행운을 믿어야 합니다." - 이는 자크 아펠이 즐겨하던 말로, 메종이 소중이 여겨온 '행운'의 가치는 끊임없는 영감을 선사했습니다. 

 

/출처 반클리프아펠

 

 

사랑의 순간과 함께 시작한 반클리프 아펠은 100년의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랑의 순간에 함께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행운의 상징으로 불리는 반클리프 아펠.

소중한 날 소중한 이에게 반클리프 아펠만큼 매력적이고 의미 있는 선물이 있을까?

언젠가 나에게도 반클리프 아펠이 찾아올 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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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시함이 트렌드다! 미국 최대의 란제리 브랜드 빅토리아시크릿 (Victoria's Secret)



"자신감 넘치고 당당하게 워킹하는 여성들이 관음증이 있는 남성들을 만족시켜주면서 주류 란제리 회사"가 된 빅토리아시크릿은 매년 열리는 빅토리아시크릿 쇼로도 유명한데 필자도 즐겨보고 관심있는 브랜드 빅토리아시크릿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란제리 속옷에 대한 개념을 바꿔놓은 빅토리아시크릿은 1977년 스탠퍼드 MBA 출신 로이 레이먼드(Roy Raymond)가 아내에게 속옷을 사다주러 갔다가 부끄러움과 불편함을 느끼면서 '남자가 쇼핑하기 편한 여성 속옷 가게'를 열면서 시작한 브랜드 입니다. 본사는 미국 오하이오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남성 고객에게 여성 속옷을 판매하는 전략을 취했으나 수익이 악화되고 파산위기에 직면하면서 1982년 오하이오 주 콜롬버스에 있는 리미티드 스토어의 창립자 레슬리 웩스너에게 백만 달러에 회사를 매각했습니다. 경영권 이전 후 레슬리는 기존의 기업철학을 변경하여 여성 소비자들에게 집중했고 새로운 색상, 패턴, 스타일링을 적용했습니다. 2000년 초반에는 미국 내에 집중해서, 2006년까지 미국에만 1,000개의 매장을 오픈했습니다. 이후 2010년 캐나다로 사업을 확장해서 23개의 상점을 오픈했고, 2010년 이후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등의 남미지역, 쿠웨이트, 폴란드 등 세계 곳곳으로 확대해 나가고 있습니다. 주로 여성을 위한 속옷, 의류, 수영복, 화장품을 디자인하고 만들어 판매하고 있습니다. 사업부문은 소매점인 빅토리아 시크릿 스토어 (Victoria's Secret Stores), 온라인과 카탈로그 영업 부문 빅토리아 시크릿 다이렉트 (Victoria's Secret Direct), 화장품 라인 빅토리아 시크릿 뷰티 (Victoria's Secret Beauty)로 나뉩니다. 빅토리아시크릿은 2012년 610억 달러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했고 100억달러의 영업수익을 기록했습니다. 수천 개의 미국 매장에서 웹사이트를 통해 여성복, 란제리, 미용제품을 판매하고 있고 연간 배송 3억 7,500만 건이 넘습니다. 


1995년부터는 홍보와 마케팅의 수단으로 매년 연말 패션쇼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서 황금시간에 방송하는 빅토리아시크릿 쇼는 환상적인 무대와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속옷을 입은 아름다운 몸매의 사랑스러운 모델들 (빅토리아 시크릿 엔젤스)이 출연하는 대중적인 쇼입니다. 매년 다른 장소와 다른 컨셉의 무대, 최고의 셀럽, 그 해 가장 인기있는 가수의 공연등 다채롭고 호화스러운 설정으로, 공중파 방송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란제리 패션쇼를 대중적인 쇼로 만든것 입니다유명인과 인기 스타들이 매년 수백만 달러를 받고 빅토리아 시크릿쇼 에서 특별한 무대를 펼칩니다. 이제 빅토리아시크릿 쇼는 하나의 문화코드이자 축제입니다. 빅토리아시크릿쇼에서 거대한 천사, 악마, 나비, 공작 등의 다양한 날개를 하고 걸어나오는 모습은 빅토리아 시크릿의 상징입니다. 


빅토리아시크릿 엔젤로 불리는 여자들의 로망이자 일명 다이어트 자극 몸매로 유명한 수많은 톱모델들 엔젤스에 소속되어있습니다. 현재 가장 잘나가는 모델을 알고싶다면 빅토리아시크릿 쇼를 보라는 말이 있을정도로 여자라면 누구나 알만한 미란다 커, 아드리아나 리마, 캔디스 스와네포엘 등 최고의 모델을 배출해 내고 있습니다. 빅토리아시크릿 엔젤스는 1997년 광고 모델로서 엔젤스들을 내세우기 시작했는데 헬레나 크리스텐센, 카러 뮐더르, 다니엘라 페스토바, 타이라 뱅크스가 초기 모델입니다. 엔젤스들은 런웨이로 집중되는 특성상 감추어져왔던 백 스테이지 모습까지도 노출되고 있는데, 백 스테이지에서 엔젤스들이 걸친 핑크색 가운역시 빅토리아시크릿의 심볼중에 하나입니다. 이 밖에도 엔젤스들의 메이크업, 헤어 스타일링, 운동법등 모든 것이 관심의 대상이자 상품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현재의 엔젤스>

릴리 앨드리지, 알레산드라 암브로지우, 케이트 그리고리예바, 요세피네 스크리베르, 테일러 힐, 엘사 호스크, 마사 헌트, 모니카 야가치아크, 아드리아나 리마, 스텔라 맥스웰, 베하티 프린슬루, 라이스 히베이루, 사람 삼파이우, 로메이 스트레이트, 캔디스 스워너풀, 재스민 툭스


<과거의 엔젤스>

타이라 뱅크스, 지젤 번천, 레티티아 카스타, 헬레나 크리스텐센, 셀리타 이뱅크스, 린지 엘링슨, 야스민 가우리, 이자베우 굴라르, 로지 헌팅턴화이틀리, 샤넬 이만, 하이디 클룸, 카롤리나 쿠르코바, 머리사 밀러, 카런 뮐더르, 다니엘라 페스토바, 이네스 리베로, 스테퍼니 시모어, 미란다 커, 에린 헤더턴, 칼리 클로스, 다우천 크루스, 찬드라 노스




[네이버 지식백과] 빅토리아 시크릿 [Victoria's Secret] (두산백과)





구찌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렉산드로 미켈레' 

요즘 패션계 대세중의 대세는 바로 구찌.


주춤하던 구찌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온 엄청난 크리에이트 디렉터 '알렉산드로 미켈레'

그가 사실 무명 디자이너 였다는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 유명 디자이너가 대형 브랜드의 디자이너가 되는게 최근의 일반적인 분위기인데도 불구하고 그를 발탁한 구찌의 한수도 알렉산드로 미켈레의 감각도 모든것이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 




[사진출처:보그]



알렉산드로 미켈레 Alessandro Michele 


1972년 이탈리아 로마 출생

Academia di Costume e di Moda 졸업

레코팽 니트디자이너 3년 

팬디 시니어 악세서리 디자이너 3년

2002년 구찌 입사 





과거 구찌의 톰포드 시절 프리다 지아니니와 함께 내부에서 지아니니의 오른팔로 일하며 악세서리 디자인을 하며 조용히 12년을 보냈다. 톰포드가 떠나고 프리아 지아니니가 구찌를 맡은후 톰포드의 빈자리를 채우며 매출을 40%이상 성장시켰다. 하지만 참신한 디자이너들의 변화들 속에서 약간은 보수적이고 클래식함을 유지해 나가던 구찌는 조금식 식상한 브랜드가 되어가며 경기침체와 중국시장 변화등으로 위기를 맞이했다. 결국 프리아 지아니니는 컬렉션이 얼마 남지 않은 시즌 중에 구찌에서 물러나게 된다. 수장이 물러나면 함께 일하던 팀이 자연스럽게 해체되기 마련이었던 분위기속에 알렉산드로 미켈레도 자연스럽게 구찌를 퇴사 할 계획이었다. 2015년 1월 구찌에 새로운 CEO 마르코 비자리(Marco Bizzarri)가 커피를 마시기 위해 미켈레의 집을 찾아왔다.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이미 구찌를 떠난 상태였기 때문에 4시간동안 마르코 비자리와 커피를 마시며 모든것을 오픈한채로 정직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것은 사실 면접이었다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고 한다. 대화가 끝나고 미켈레는 런던으로 짧은 여행을 떠났는데 몇일 뒤 마르코 비자리가 일주일안에 패션쇼를 준비할수 있겠냐며 전화를 걸어 왔다고 한다. 비자리의 제의에 놀랐지만 미켈레는 짧은 일주일 만에 구찌의 새 남성복 컬렉션을 성공적으로 치루었다. 3일간 같은 점퍼를 입고 머리와 수염이 덥수룩할 정도의 미친 상태로 다른 부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컬렉션을 준비했다고 회고했다. 컬렉션을 선보인지 이틀 뒤, 구찌의 모회사 커링 그룹은 그를 구찌의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공식적으로 임명했다. 메인 디자이너된 해에는 인터내셔널 디자이너 어워드를 수상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패션 평론가 로빈 기브한은 '큰 의미의 자유와 다양성이 담겨있는 컬렉션이자 모든 아이템이 크로스 코디가 가능한 자유로운 패션이다.'라고 평했다.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빈티지와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 패턴과 프린트의 믹스, 절충주의, 자유분방한 디자인 미학을 보이며 그만의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보여주고 있다.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르네상스 시대의 '장식의 화려함'과 '모든것이 가능한 규칙없는 아이디어'를 좋아한다고 한다. 로마에 있는 미켈레 자신의 집에는 아름다운 옛날 그림들, 원단조각, 보석, 신발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처럼 가득하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로 미켈레는 어느날 자신이 복잡한 일정속에 스스로도 무슨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상태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스스로 순간순간을 살도록 정해진 운명이라 믿고 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룩이 컨템포러리하게 보인다고 믿고있다. 그의 남성복과 여성복 컬렉션을 보면 그만의 젠더 플루이드(Genderfluid;성 정체성과 젠더가 고정되지 않고 유동적인 사람)를 추구하고 있음 느낄 수 있다. 파격적인 컬러들을 사용하면서 남성복과 여성복의 경계를 허문 젠더리스룩을 보여준다. 디자인 역시도 남성과 여성의 경계를 넘나든다. 과장된 리본을 남성복에 사용하거나 여성복에 슈트를 내세우기도한다. 미켈리는 버버리처럼 남성복과 여성복 컬렉션을 통합해 한 무대에서 선보이기로 했다. 패션에 접근하는 그의 방식은 머스큘린과 페미닌 사이의 통합보다는 순수한 아름다움의 종류를 찾는 것에 집중한다. 


"나는 젠더보다 아름다움에 대한 생각의 관점에서 패션을 시작했다. 아름다움은 마치 당신이 아름다운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것과 같다. 그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당신이 아름다움에 손을 내밀기 시도한다면 그것은 진짜 위험하다. 아름다움은 일종의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히피같은 삶을 살았다던 그의 아버지를 닮고 싶다는 그의 컬렉션에는 그만의 자유로움이 가득하다. 2016년부터 '알렉산드로 미켈레 효과' 라는 말이 떠돌 정도로 그의 빈티지클래식 무드에 많은 디자이너들이 영향을 받고 있다. 스네이크 로퍼와 블로퍼 등 빈티지하고 복고적인 컨셉과 뱀, 벌 등의 자수를 놓은 아이템들을 잇달아 내놓으며 구찌는 기존 고객층 부터 젊은 패션피플들의 마음도 사로잡으며 매출 역시 상승가도 중이다. 위기의 구찌를 새로운 부활로 이끈 영웅인 셈이다.



또한 믿기 어렵겠지만 화려한 악세서리를 강조하는 구찌에서 그는 판매개념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10년 동안, 마켓은 제품으로 넘쳐났다. 패션은 제품이 전부가 아니다. 패션은 당신이 입어보고, 그 아이디어와 사랑에 빠져 결국 제품을 살 수 밖에 없도록 만드는 놀라운 아이디어가 핵심이다. 따라서 당신은 그 아이디어를 산 것이지 물건을 구입한 것이 아니다'"



절제가 가득했던 기존의 구찌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듯했던 꽃, 나비, 새, 도마뱀, 잠자리들을 요란한듯 옷과 가방에 자수를 놓은 그의 디자인은 마치 할머니 옷장 깊숙하게 잠자던 옷처럼 촌스러운듯 요란했지만 그의 디자인은 따뜻한 자연미를 살린 빈티지 미학이다. 획일화되고 차가운 도시에 지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한 그의 디자인은 구찌의 정통성과 가치를 오랜기간 묵묵히 이해하고 지내왔던 무명의 시간들과의 그의 감성콜라보레이션의 성공적 만남이었다고 생각한다.  2017년에는 그의 빈티지함과 오리엔탈 무드가 가득한 컬렉션을 선보이고 있다. 치파오나 기모노를 연상시키거나 동양화가 구찌 위를 수놓았다. 용이나 호랑이등의 동양적인 동물이나 디즈니의 도널드 덕처럼 친숙한 캐릭터를 곳곳에서 볼수 있다. 큰 이변이 없는 한 올해 역시 가장많은 #ootd (Outit of the day) 는 구찌가 차지하지 않을까? 





[참고] 패션엔 2016.06.02



요새 정말 제대로 미친 구찌(Gucci) - 마케팅 & 캠페인 편





구찌의 역사편에 이은 구찌이야기 두번째. 오늘은 구찌의 광고 마케팅과 캠페인을 소개하려한다.

저명한 명품 브랜드라면 특별한 마케팅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지 않나? 라는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치열하고 냉정한 패션계에서 오래도록 사랑받는 브랜드들은 이유가 있게 마련이다. 잠시 주춤했던 구찌의 주가가 다시 상승한 요인이 그저 '예뻐서'인 기본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 외 다양한 활동이 뒷바침이 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찌의 광고



구찌의 설립자인 '구찌오구찌'가 이탈리아 피렌체에 처음 매장을 오픈한 다음해인 1922년에 상류층의 패션과 이탈리아 장인의 기술이 합쳐진 가죽 전문점이 탄생했음을 지면을 통해 알린것이 구찌의 첫 광고였다. 1950년대~1960년대에는 현재의 공항패션 처럼 공항에서 유명인사들이 구찌의 가방을 들고 가는 모습이나 로마의 구찌매장을 방문하는 모습이 자주 보도되면서 구찌의 대중적 선호도는 높아졌다. 특히, 1950년대 '그레이스 켈리'가 로마 콘도티 거리의 구찌매장을 방문하게 되었고 그녀를 보기 위해서 구찌 매장앞에 수많은 인파가 모여든 사진으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브랜드로 사람들에게 각인 되어졌고, 뿐만아니라 로마에 가면 꼭 들러야 하는 곳으로 로마의 명소가 되었다. 이때 이러한 구찌 매장을 방문하고 싶어 하는 심리를 반영하여 이탈리아 거리를 배경으로 제품 사진을 찍고 로마와 피렌체같이 구찌 매장이 있는 곳의 이탈리아 지역명을 표시하는 방식의 지면광고를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1970년대~1980년대를 지나면서 최상급 품질의 여행가방을 파는 브랜드로 알려져 있는 구찌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신 중산층들이 선호하는 브랜드로 자리잡았고, 이런 구찌의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양손에 여행가방을 들고 있는 기사의 모습을 하고 있는 구찌 크래스트(CREST) 로고를 선보였다. 


구찌의 첫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톰포드'가 있던 1995년부터 2004년까지 전통적인 가죽브랜드에서 세계에서 가장 관능적인브랜드로 각인시키게 된 강력한 수단으로 광고가 이용되었다. 톰포드는 동성애,삼각관계 등을 광고에 이용하는 패션과 성적코드를 결합한 이른바 '포르노 시크(Porno Chic)'의 창시자이다. 프랑스 출신의 스타일리스트 '카린 로이펠드', 세계적인 사진작가 '마리오 테스티노'와 함께 작업하면서 관능적인 비주얼을 고급스럽게 풀어냈다. 스타일리스트이자 에디터였던 '카린 로이펠드'는 "패션의 역사를 이야기할때 톰포드 이전과 톰포드 이후로 나뉜다. 그는 마케팅의 힘을 진정으로 이해했던 최초의 디자이너."라고 말하며 그를 인정했다.


TV를 통해 처음 선보였던 광고는 2007년 두번째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리다 지아니니'가 만든 구찌의 첫번째 향수 구찌바이구찌 뿌르 옴므 였다. 감독 '데이비드 린치' 와 영화배우 '제임스 프랭코'가 출연하며 화제를 모았다. 창립 90주년을 맞은 2011년에는 흑백사진으로 1950년대의 구찌 작업장에서 일하는 장인의 모습을 광고에 사용하면서 구찌의 전통을 과시했다. 


최근 '알렉산드로 미켈레'가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임명되었고 파격적인 행보로 구찌의 새로운 전성기를 이끌고 있다. 지난 시즌 따뜻한 자연미를 살린 빈티지한 스타일로 사람들의 감성을 움직였고 그에 맞추어 식물원 컨셉의 광고를 선보였다. 유리 돔 형태의 식물원에서 각종 야생 식물과 거닐고 있는 플라밍고 (홍학류 새), 다채로운 패턴의 러그, 수북하게 쌓인 고서를 배경으로 촬영하였다. 생기발랄한 모델들은 호기심과 자유, 젊음, 초현실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해 화제를 모았다. 






구찌의 캠페인



2004년 구찌는 유니세프와 파트너십을 맺어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들을 돕는데 힘쓰고 있으며, 2009년에는 9월 16일을 'GUCCI For FFANWN Day' 로 지정하여 이날 수익의 10%를 현대여성진흥기금(FFAWN, 여성들의 자립과 성공을 돕는 기금단체)에 기부하는 칵테일 파티를 개최했다. 


'프리다 지아니니'는 2010년 부터 환경과 이웃을 배려하는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전 세계 구찌 직영매장에서 '에코 프렌들리 프로젝트'를 시행하고 쇼핑백과 포장 박스사용을 줄이고 재활용이 가능한 인증용지를 사용했으며 반짝이는 겉면표현을 위해 플라스틱 코팅을 사용하는것을 일절 제한하기도 하였다. 리본,가먼트 백(백,슈트,슈즈 등을 구입할 때 브랜드에서 함께 제공하는 천으로 이루어진 된 덮개)도 폴리에스테르에서 코튼 소재로 변경했다. 그 외에도 업무 시간 이후 소등하기, 빛 감지기 설치 등 매장에서 시행 가능한 에너지 절약 프로그램들을 도입하면서 35톤의 플라스틱 쓰레기 배출을 감소시키고 1400톤의 종이 소비를 감소시켰으며 10,000톤의 Co2 배출을 감소시키는 등의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구찌의 전CEO '패트리지오 디 마르코'는 "세계적인 브랜드들은 오늘날 단지 제품과 서비스 뿐 아니라 커뮤니티 속에서 어떻게 행동하고 또 환경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지느냐에 대해 평가받고 있다."고 말하며 구찌는 2004년 부터 자발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인증 절차를 진행하고 있고 이를 통해 경영 윤리, 인권존중, 환경. 근로자들의 안전,건강,권리 등을 공언하고 있다고 밝혔다. 


더 나아가 2013년 구찌는 전 세계 여성과 여자 어린이의 교육,건강,인권 문제에 대한 인식 제고와 해결을 위하여 글로벌 캠페인인 '차임 포 체인지 CHIME FOR CHAGE : CFC)를 시작했다. 이 캠페인은 구찌의 모기업인 케링의 CEO '프랑수아 앙리 피노'의 부인이자 배우인  '셀마 헤이엑 피노'와 '프리다 지아니니' 그리고 팝가수 '비욘세 놀즈 카터'가 공동으로 창설하였고 우리나라 배우 이영애는 아시아 배우 최초로 CFC 자문위원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CFC와 '글로벌시티즌'과의 파트너십으로 포메이션 월드투어를 진행하여 전세계 남녀평등을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다.


2012년 구찌는 한국의 문화유산 보존 사업을 위하여 한국네셔널트러스트에 5년간 총 5억원을 후원하기로 하였다. 2013년 한국네셔널트러스트는 구찌와 서울특별시가 후원하는 '나의사랑 문화유산' 캠페인을 발족하여 시민들이 직접 유실 위험에 처하거나 문화적 가치가 잘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산을 찾아 소개하고 보존하게 하였다.






구찌의 문화 마케팅



현재 구찌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알렉산드로 미켈레'의 기획으로 구찌이 글로벌 디지털 프로젝트인 #구찌그램(Guccigram) 이 시작되었다. 전 세계의 아티스트들과 협업한 작품을 인스타그램등의 SNS에 공개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첫번째 주제였던 구찌 블룸(Gucci Blooms)과 구찌 칼레이도(Gucci Caleido) 문양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된 작품을 공개했다. 2016년의 프로젝트 주제는 구찌의 SS컬렉션 티엔(Tian)의 프린팅을 재해석한 작품을 선보였다. 티엔(Tian)은 중국어로 하늘,천상을 의미하는데 이것을 기본으로 10세기의 중국 화조화 화법의 세련되고 섬세한 아름다움을 형상화했다. 중국에서 모티브를 가져온 이 프로젝트에는 한국을 포함 아시아의 작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작품들은 구찌의 마이크로사이트 나 인스타그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구찌는 이밖에도 다양한 작가들이나 인플루언서 (Influencer: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섭외하여 다양하 콘텐츠를 만들어 내고 있다. 자사 신발인 '에이스 스니커즈'를 알리기 위해서 젋은 아티스트들과 함께 디지털 미디어 콘텐츠를 만들어 소셜미디어에 노출했다. 이 신발을 신고 롱보드를 타는 한국의 '롱보드여신' 고효주 씨와 노르웨이 스냅쳇스타 '지오스냅' 그리고 브라질 스트릿 아티스트 '아난다 나후' 등과 협력해 제작


이 외에도 구찌는 일본 구찌 런칭 50주년과 탄생 40주년을 맞이한 헬로키티를 기념하여 재미있는 콜라보레이션을 진행하기도 하고, 꼼데가르송과 크리스마스 프로젝트로 콜라보레이션을 하면서 다양하고 새로운 마케팅을 진행하기도 했다. 

구찌는 단순히 구색에 맞춘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이 아닌 제대로된 모바일 마케팅을 진행하는 브랜드 중 하나이다. 구찌의 어플리케이션 '구찌의 세계'를 통해 구찌의 신제품, 뉴스, 매장정보, 뮤직비디오, 패션쇼 영상등을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고, 다수의 그래미상을 수상한 뮤직프로듀서인 '마크론슨'이 제작한 '구찌비트'를 통해 음악 믹싱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구찌 음악 채널'을 통해 구찌에서만 들을 수 있는 곡들을 시즌별로 보여주고 있다. 






구찌는 단순히 제품 홍보 뿐만 아니라 구찌만의 문화 컨텐츠를 만들어 나가고 있다. 고정된 브랜드 이미지에 집착하지 않고 새로운 시도를 더하는 것에 거침이 없다. 시대의 변화에 맞추어 소통하는 마케팅과 다양한 사회공헌 활동 캠페인을 보여주고 있는 구찌의 미래는 여전히 기대로 가득차 있다. 수많은 명품브랜드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도 환생에 성공한 브랜드라 인정받고 있는 구찌의 인기는 어쩌면 이미 준비되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참고]

네이버 세계브랜드백과

비즈조선 [럭셔리인사이트] 18년만에 최고 주가 기록한 구찌의 성공 비결 3가지 2017.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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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정말 제대로 미친 구찌(Gucci) - 역사편





구찌가 미쳤다. 물론 좋은 의미로.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분명 공감의 마음으로 클릭했을 것이라 믿는다.


구찌의 룩북을 보고 이렇게 미소지어 본지가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최근에 다녀온 마카오에서도 나는 구찌 매장에서 가장 오랜시간을 보냈다. '패트리지오 디 마르코' CEO 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프리다 지아니니'가 물러나고, ''마르코 비자리' CEO와 그가 무명의 디자이너 '알렉산드로 미켈레'를 새로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파격 승진시킨 일은 그야말로 구찌의 '신의 한수' 였다. 

새롭게 등장한 다크호스 '알렉산드로 미켈레' 와 관해서는 따로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프리다 지아니니'의 사임은 새로운 구찌를 위한 자진 사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2014.12.13 기사)는 실적부진으로 구찌의 고위경영진 2명 (CEO 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이 전격 교체 된다고 보도했다. 기사에 의하면 구찌의 2014년 3분기 매출이 전년동기 대비 1.6% 감소했으며 상반기에는 4.5%가 감소 했다고 한다. 실적 부진을 타개하기 위한 구찌의 선택은 성공적이다. 

파격적 인사와 함께 최근 다시 가장 핫한 브랜드로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구찌의 역사는 어떻게 흘러왔을까?











구찌(GUCCI) 는 구찌오 구찌(Guccio Gucci)에 의해 이탈리아 피렌체에 설립한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이다.

구찌의 창립자인 구찌오 구찌는 1881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대대로 밀집모자를 만들던 집안에서 태어 났다. 구찌오 구찌는 밀짚모자 사업이 사양 산업이라고 판단하여, 그의 나이 17세때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전 세계 부호들이 모이는 사보이호텔(Savoy Hotel)의 벨보이로 들어간다. 허드렛일이지만 상류층 고객들의 최고급 가죽트렁크를 옮기며 깊은 인상을 받았고 가죽제품의 매력에 빠지게 된다.



이후 1902년 고향인 프렌체로 돌아와 프란지(Franzi)라는 제조업체에서 가죽 공방 기술을 배우고, 1921년 피렌체의 비냐 누오바 거리(Via VignaNuova)에 자신의 이름을 딴 '구찌' 가죽전문매장을 열었고, 연이어 같은 해 빠리오네 거리(Via Del Parione)에 두번째 매장을 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적 명품 '구찌'의 시작이었다. 그 후 네 아들과 함께 1940년대 무렵 밀라노,로마 등 이탈리아 패션 중심지를 비롯, 1950년대 부터는 런던, 뉴욕, 파리 등 전세계로 매장을 확대했다.




'구찌'를 오픈하기 전 구찌오 구찌는 1906년 작은 마구상을 운영하면서 가죽 승마용품으로 인기를 끌었었다. 하지만 승마용품은 귀족들에게는 인기가 많았지만 마차의 활용이 점차 줄고 자전거가 인기를 끌면서 마구상을 접고 작업장과 제품군을 을 확대하여 '구찌'가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인지 구찌의 가죽제품은 승마로부터 영감을 받은것이 많았다. 승마 용품중 호스빗(Horsebit:말의 재갈)을 가죽용품에 장식하는 것은 구찌의 고유한 상징이되었다. 














구찌는 위기에 강하다


 구찌는 위기의 상황도 현명하게 대처했다. 1940대 제 2차 세계대전으로으로 모든 물자가 전쟁에 동원대야 했고, 국제연명에선 이탈리아로 수출금지령을 내려 가죽이나 금속 등의 소재가 부족해졌다. 첫째 아들 알도 구찌(Aldo Gucci)는 대나무, 대마, 황마 등의 대체품을 사용하는 아이디어를 냈고, 대마와 삼마를 이용해 작은 다이아몬드 형태가 서로 연결되는 직조로 새긴 디아멘테(Diamante) 캔버스가 나왔다. 위기의 순간에 구찌의 첫 시그니처 캔버스가 개발 된 것이다. 1947년 제 2차 세계대전은 종료되었지만 패전국인 이탈리아의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이때 수많은 가죽 업체가 도산했다. 알도 구찌는 가죽을 돼지피역을 활용하는 대안을 찾아냈고, 유일하게 수입이 가능했던 일본의 대나무를 활용하기도 했다. 전쟁 후의 위기는 구찌 역사상 가장 인기제품으로 알려진 뱀부백(Bamboo Bag)이 탄생했다.







가족경영, 그리고 경영권싸움


 1953년 창립자인 구찌오 구찌가 72세로 세상을 따나고, 알도 (Aldo), 바스코 (Vasco), 우고 (Ugo), 로돌프 (Rodolfo) 구찌 4형제가 구찌를 이어 받았다.  알도 구찌는 탁월한 비지니스 감각으로 구찌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960년대 중반에 창립자인 아버지 이름에서 딴 GG 로고를 만들고 이를 캔버스 소재로 만들어 가방, 옷, 악세서리에 사용했으며 같은해에 재키 백(Jackie Bag)을 만들었다. 또한 팜비치,비버리힐즈,도쿄,홍콩 등에 매장을 내며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하게 했다. 구찌는 가족 경영진에 결정을 통해 로돌프 구찌가 경영권을 가지게 되었다. 1년 뒤, 로돌프 구찌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마우리초(Maurizio) 구찌가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하지만 알도 구찌의 아들인 파올로(Paolo) 구찌는 마우리초 구찌의 경영권 승계에 크게 반발했고, 파올로 구찌(Paolo Gucci) 라는 이름으로 핸드백,악세서리, 와인 등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이는 구찌 이사회의 반발을 불러 일으키며 이탈리아 전통의 가족 경영에 위기가 왔고 무분별한 라이센스 남용으로 구찌의 이미지도 추락하면서 구찌의 재정난도 심화되었다. 가문내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구찌오 구찌의 손자 마우리초는 구찌의 옛 명성을 찾기위해 노력했다. 마우리초 구찌에 의해 90년대 뉴욕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 톰포드(Tom Ford)가 영입되었고 변화와 노력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던 1995년 밀라노 자택 앞에서 마우리초 구찌는 전처의 총에맞아 사망하는 비운의 인물이 된다.







전문경영인의 시대 



 1984년 이탈리아 출신으로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워싱턴의 로펌에서 변호사로 근무하던 도메니코 데 쏠레(Domenico De Sole)를 구찌 아메리카의 사장 겸 관리이사로 영입했고, 버그도프굿맨(Bergdorf goodman)백화점 뉴욕지사장 돈 멜로(Dawn Mello)를 디자인 총괄이사로 영입했다. 이로써 구찌의 전문 경영인 시대가 시작되었다. 도미니코 데 쏠레는 남발했던 구찌의 10만여종에 달하는 라이센스 사업을 정리했고 프렌차이즈도 환수해가면서 전세계적인 명성을 되찾아갔다. 1987년부터 바렌인에 본사를 둔 투자회사 인베스트코프(Investcorp)가 구찌의 지분을 인수하기 시작했고, 1989년 알도 구찌와 파올로구찌가 보유한 50% 지분을 모두했다. 이후 1993년 마우리초 구찌가 자신의 50% 주식 지분을 매각하면서 인베스트코프가 구찌의 전체 지분을 차지했다. 1995년 돈 멜로는 구찌를 떠나 버그도프굿맨 백화점을 회장으로 돌아갔고, 도메니코 데 쏠레는 구찌의 CEO(최고 업무 책임자)를 맡았다. 1998년 구찌는 "올해의 유럽 기업"에 선정되고, 이후 패션계 에서는 단순히 옷을 디자인하는 수석 디자이너 개념에서 더 나아가 매장 구성과 광고까지 진두진휘하여 브랜드 전체의 이미지를 만들어가는 크리에이티브 디랙터라는 포지션이 유행하게 된다. 

 

 1999년 구찌는 피노-프렝탕-루두트(PPR : Pinault-Printemps-Redoute)와 전략적 제휴를 맺고 단일 브랜드 회사에서 복수 브랜드 그룹으로 전환했고 구찌그룹(GUCCI Group)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이브 생 로랑', '세르지오 로시' 등 많은 브랜드를 흡수했고 몸집을 키워나갔다. 2004년 구찌 변화의 주역이었던 도미니코 데 쏠레와 톰포드는 재계약에 대한 PPR그룹과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구찌를 떠났다. 이 후 마크 리(Mark Lee)가 구찌의 새로운 CEO로 지명되고, 남성복 디자인의 존 레이(John Ray), 여성복 디자인의 알렉산드라 파치네티(Alessandra Facchinetti), 악세사리 라인에 프리다 지아니니(Frida Giannini)로 구성된 3인 디자이너 체제가 시작되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프리다 지아니니는 전 펜디(FENDI)의 핸드백 디자이너 였고, 그녀가 맡은 악세서리 라인이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얻게되면서 2006년 구찌 전체를 단독 총괄하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었다. 프리다 지아니니가 구찌를 맡은 후 4년간 구찌의 매출은 46% 신장했고, 2007년 시장 조사 전문회사 닐슨(Nielsen)은 '세계에서 가장 갖고 싶은 럭셔리 브랜드'로 구찌를 선정했다.

 

2009년 마크 리를 대신하여 패트리지오 디 마르코(Partizio di Marco)가 CEO로 구찌에 합류했고 같은 해에 구찌의 디자인 사무실을 로마의 팔라조 알베리니로 옮겼다. 그리고 현재는 서두에 이야기했던 대로 2014년 구찌의 실적부진으로 다시 변화가 찾아온다. 구찌의 부활을 위해 임명된 마르코 비자리(Marco Bizzarri) 가 CEO를 맡았다. 그는 '스텔라 메카트니'와 '보테가 베네타'등 다른 명품브랜드의 CEO를 맡아 성장을 이끌어낸 '두 자릿수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가진 전문경영인다. 맡는 기업마다 두 자릿수의 성장률을 달성하여 붙여진 별명이다. 무명의 내부 직원이었던 알렉산드로 미켈레를 수석디자이너로 임명한것도 마르코 비자리이다. 타 명품 브랜드가 외부의 간판급 스타 디자이너를 영입하고, 그 디자이너가 자기의 팀을 데려와 제품을 개편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브랜드 혁신과 전면 쇄신을 외치는 상황에 내부 승진은 드문일이었다. 프리다 지아니니가 밀라노 패션쇼를 5일 앞두고 사표를 던지고 나가면서 후임자 물색이 덜 끝났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지아니니를 도와 구찌를 이끌던 알렉산드로 미켈레의 내부승진은 대 성공이다.





  • 오늘은 구찌의 역사적 큰 사건을 중심으로 흐름을 살펴보았다. 1920년대 작은 가죽전문점에서 시작한 구찌는 약 100년동안 위기와 기회를 현명하게 대처하며 지금까지 명실상부한 대표 명품(名品) 브랜드의 자리를 이어오고 있다. 역사만 살펴보았지만 구찌는 현재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늘 사회 발전과 문화 보존 등에 기여하기 위해 힘썼다. 이러한 면들 역시 구찌를 이어가게 하는 명맥이 아닐까 싶은데,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편에서 다뤄봐야겠다. 마지막으로 마르코 비자리의 인터뷰에서 '명품이 되는 조건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마지막으로 이번 구찌-역사편을 종료 해야겠다. 안녕.

  • "첫째는 시간입니다. '명품(luxury)'이라는 가치를 갖기 위해선 절대적으로 시간과 그에 따른 역사가 필요합니다. 신규 브랜드들이 명품 시장에 진출하기 쉽지 않은 것은 이 때문입니다. 둘째는 제품에 대한 투자입니다. 이를 통해 브랜드를 차별화해야 합니다. 명품 업계에서 제품에 투자한다는 것은 제조 업계에서 연구·개발(R&D)에 투자하는 것과 차원이 다릅니다. 자금을 투자해 기계를 새것으로 바꾼다고 해서 제품이 좋아지는 사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명품을 만드는 것은 장인, 즉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품에 대한 투자는 곧 사람에 대한 투자입니다. 최상의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고의 사람이 필요합니다."





  • [참고자료]
  • 세계브랜드백과,인터브랜드) 구찌(Gucci) 
  • 나무위키
  • 2015.11.07 [Weekly BIz] '두 자릿수 성장'의 마법사 "나만의 경쟁력을 파악하라"
  • 2014.12.13 구찌, 실적 부진에 고위 경영진 2명 전격 교체 - 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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